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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대한민국 국보·보물·사적의 불편한 진실

    최지은 기자

    국보國寶 보물寶物 사적史蹟 1호가 이상하다 서울의 남쪽과 동쪽 대문이 왜 국보와 보물 1호가 되었는가? 왕궁도 아닌 대문이 왜 1호란 말인가? 안방이 아닌 대문이 1호인 집도 있는가? 그리고 사적 1호도 왜 신라 망국을 상징하는 포석정이란 말인가?


    지난 주말 대한사랑 활동을 하며, 남대문이 국보 1호인 이유를 물어보면 다들 잘 모른다고 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심어놓은 바람 그대로 이 땅의 주인들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제 깊은 잠에서 새 시대의 주인들을 깨워야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된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자.

    한양의 사대문을 파괴하라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합방으로 조선이 일제에게 완전히 먹힐 때, 숭례문을 비롯한 한양의 사대문은 모두 철거될 위기에 몰렸다. 일제는 도시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교통에 장애물이 되며, 선인동화鮮人同化에 방해가 된다는 구실로 사대문을 강제로 철저하려 했다.

    • 첫째, 도시계획에 걸림돌이 된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모임인 ‘일본거류민회’는 대대적인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서소문~수구문(광희문)을 직통하는 도로를 개설하고, 종로를 십자대로로 조성하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한 왜성대 등 남산 북록을 공원화하는 것과 용산에 대규모 경마장을 건설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숭례문을 비롯한 조선의 성곽들은 걸림돌이 되었다.

    • 둘째, 교통의 장애물이다. 용산 신도시 도시계획이 발표되자 숭례문은 ‘교통의 장애물’로 취급되었다.

    • 셋째, 선인동화鮮人同化에 방해가 된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산성, 사찰, 가람 등에 배일排日 운동의 편액이나 기사가 남아있으며, 조선인들이 그 항일·배일의 흔적을 아침저녁으로 접하면 ‘선인동화’를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선인동화鮮人同化를 위해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배일 재료를 공급하고 있는 기념물이다. 그런 기념물을 조선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접하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선인동화를 부정하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 그런 기념물을 서서히 제거하는 것은 민심 통일이나 선인동화를 위해 불가결하다.”(아다치 겐조우安達謙藏, 「조선」 32호, 1910년)


    숭례문이 살아남은 이유

    숭례문(남대문)이 살아남아 국보로까지 지정된 것은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논리로 숭례문 파괴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본 거류민 중 최고 유력자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개선한 문입니다. … 파괴하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자, 숭례문 파괴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뜻을 굽힌 것이다. 흥인지문(동대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흥인지문은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였다. 반면 일제와 아무런 인연이 없던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를 당했다.





    일제가 지정한 대한민국의 문화재

    이렇게 살아남은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18년 후인 1933년, 각각 보물 1, 2호로, 경주 포석정은 고적 1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가 조선의 문화재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호하기 위한 법을 제정한 것이다. 그때 일제가 제정한 문화재에서 세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있었다.



    • 첫째, 조선은 국보가 없다. 일제는 국보 없이 보물과 고적, 천연기념물만 지정했다. 그러면서 조선 땅에는 국보가 없다고 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일본의 국보가 식민지 조선의 국보라는 이유였다. 일본 국보 1호를 전해 줬지만 국권을 상실한 조선은 국보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우리 문화재의 등급을 국보없이 하향조정했을 뿐 아니라, 숭례문, 흥인지문과 같은 정식 명칭을 남대문, 동대문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하였다.

    • 둘째, 1, 2호는 편의상 붙인 일련번호일 뿐이다. 일제는 능구렁이를 넘어선다.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 놓고, 자기들의 뜻하는 바를 우둔한 조선인이 깨닫지 못하게 한다. 처음 문화재를 지정할 때 발표한 표를 보면 등급별 번호가 아니라 ‘지정번호’ 즉 지정하는 순서대로 ‘편의상’ 번호를 붙인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입성한 ‘승전의 문(남대문과 동대문)’을 굳이 보물 1, 2호로 등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 경주 포석정이 왜 고적 1호로 지정되었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보면 경주 포석정은 ‘굴욕의 현장’, ‘망국의 상징’이다. 「신라본기」‘경애왕’ 조에는 “왕 4년(927년) 겨울 11월, 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을 때 견훤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왕은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셋째, 내선일체 혹은 조선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상징하는 문화재들. 문화재로 지정되는 기준 역시 철저하게 일본의 목적에 맞아야만 했다. 일제는 자기 나라와 관련된 문화재이거나, 조선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담은 문화재를 우선적으로 지정했다. 실제로 일제는 임나(일본부)와 관계되는 경남의 유적들을 고적으로 등록했다. 이처럼 일제의 입맛에 맞는 보물과 유적들이 먼저 지정된 것은 우연을 넘어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가 지정한 번호 그대로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단순 숫자’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면서 말이다. 문화재 관리청은 어떤지 모르지만,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현 국보 1호, 보물 1호, 사적 1호는 한마디로 ‘일제의 개선문이요, 조선 망국의 상징’을 그대로 표현한 숫자 1로 보인다. 이것은 지나친 상상인가, 아니면 일제의 원 뜻을 혜안으로 파악한 것인가? 일제가 일본 장수들의 개선문인 남대문과 동대문을 기념하고 싶어 했고, 잔치를 베풀며 술판을 벌이다 망했다는 ‘굴욕의 현장’이자 ‘망국의 상징’을 1호로 삼고 싶어 지정한 것은 분명하다. 일제가 문화재를 이런 식으로 등록한 것은 철저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아직 망설이고 있다. ‘나라가 망해도 술판을 벌이는 무지몽매한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치졸한 일제 앞잡이들의 의도를 떨쳐내지 못하고, 아직도 살아남아 꿈틀거리는 식민사학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아래 국보와 보물, 사적 1~5호를 보자. 이 유물과 유적도 훌륭하지만 한민족의 원형문화와 정신을 대표하기엔 부족하다. 아직도 이것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 것은 담당 공무원들이 헛된 밥을 먹고 있다는 증거이며, 식민사학에서 깨어나지 못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단군왕검이 세운 강화도 참성단(사적 제136호)도 있고, 한국인과 1억 세계인이 사랑하는 한글도 있고, 백제의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도 있다. 그리고 신라인이 천문을 관측하던 첨성대(국보 제31호)도 있다. 왜 이처럼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정한 문화재를 엄밀히 검토하지 않고 답습하며,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가치를 따지지 않고 문화재를 지정·등록하는지, 이 땅의 주인인 국민으로서 엄정히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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