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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동북아 역사전쟁과 식민사관의 실체

    이완영 미사협 사무총장

    한중일 동북아에는 역사전쟁의 광풍이 불고 있다. 이 역사전쟁은 동북아 역사 주도권 전쟁이며 역사주권 전쟁이다. 그런데 이 역사전쟁에서 희망보다는 오히려 불안스러운 패망의 그림자가 짙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본 원인은 동북아의 주인공인 한국의 역사문화 정신이 왜곡, 조작, 말살,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역사문화 정신을 병들게 하고 한국인을 역사의 장님으로 만든, 총칼보다 무서운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의 실체는 무엇인가?


    식민사관植民史觀이란?

    대한민국 사람들이 아는 듯하면서도 잘 모르는 식민사관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하여 조작한 역사관을 말한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 사람들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식민사관이다. 조선 사람을 식민지 노예로 만들기 위해 조작하고 축소하고 날조한 역사관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서술된 한국사는 한국인이 주체적 사관으로 쓴 것이 아니다. 일제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쓰인 것을 광복 후 70여 년간 국사라고 배웠다. 침략자들이 쓴 역사,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역사가 바로 현 한국사인 것이다.

    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틀’을 말한다. 붕어빵 틀은 붕어 모양만 찍어내 듯 세모는 세모 모양을, 네모 틀은 네모 모양을 찍어낸다. 한 번 정해진 역사의 틀을 벗어난 역사 해석은 있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그 틀, 식민사관을 우선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하여 원래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조선인의 역사 DNA를 말살한 조선총독부

    무력으로 조선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가 계 획한 것은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화였다. 그들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1910∼1945)를 설치하고 그 청사를 일부러 조선시대 법궁法宮인 경복궁을 가로막고 세웠다. 이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50여 년간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1995년에 비로소 철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왕의 명령에 따라 통치를 합리화하고 조선을 식민지 노예화하기 위해 한국사 편찬에 착수했다. 1922년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였다가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라는 총독 직속의 독립 관청을 만들었다. 조선사편수회는 이후 1938년 『조선사』(전 37권)를 완간하고, 수집한 사료들을 선별하여 『조선사료총간』(전 22권), 『조선사료집진』(전 3권) 등 사료집을 편찬했다. 이 사료집들은 식민 통치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자료들을 취사, 편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단군조선이 부정되고, 한국의 역사성은 정체되고 타율적인 것으로 조작되었다.

    일본이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화를 위해 발간한 『조선사』는 광복 후 70여 년간 대한민국의 ‘국사’의 뼈대가 되어 국민들을 세뇌시켜 왔다. 대한민국은 영토 광복은 되었으나 식민사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유구한 역사적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긍지가 높아 통치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을 만드는 방법은 그들의 가장 큰 자긍심인 역사를 각색하여 피해의식을 심는 것이었다. 조선인을 뿌리 없는 민족으로 교육하여 그들의 민족을 부끄럽게 하라. 문화 역시 일본의 아류임을 강조하여 교육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거듭나고 싶어 할 것이다. 창씨개명을 통하여 먼저 조상 단군을 부정하게 하라. 그것이 식민지 국민을 식민지 국민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식민통치사』 중)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은 누구인가?

    조선사편수회는 단순한 학술단체가 아니었다. 일왕이 직접 설치를 명한 것으로 조선 뿌리 역사의 DNA를 조작하고, 역사를 왜곡, 파괴하는 핵심기관이었다. 그들은 “너희 조선인들은 조상 뿌리가 없다. 그래서 식민지 역사로 시작했다. 너희들의 자생종교와 문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미신’일 뿐이고 유사종교일 뿐이다.”라고 세뇌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의 신도를 받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성을 빼앗아 일본 이름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강단사학자라는 사람들이 민족의 뿌리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나 시민들을 ‘유사사학자’라 하면서 공격한다. 조선총독부가 우리 역사문화를 탄압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를 현재 한국의 사학자들이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들 학문의 뿌리가 식민사학이기 때문이다.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수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하고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쿠로이타·핫도리·나이토, 위원에 이마니시·이능화·어윤적·오다 등이 임명되었다. 또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修史官에 이나바·홍희·후지타 등이 임명되었다. 현 한국사학계의 뿌리인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등은 수사관으로 참여하고 최남선崔南善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먼저 우리는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 3명을 알아야 한다. 구로이타 가쓰미(1847∼1946)는 일본 민족의 기원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직접 일본 열도로 내려왔다는 천손민족을 주장했다.

    이나바 이와키치(1876∼1940)는 만선사관을 주장했다. 한민족의 민족개념을 지역개념으로 약화시키고 오늘날의 동북공정과 같은 논리로 조선사를 축소시켰다. 그는 일제의 만주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3인방의 마지막 인물은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이다. 이름이 많이 알려진 인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환국, 신시, 단군조선을 신화의 역사로 조작해 말살하고 고구려, 발해사를 중국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제 황국사관을 위해 식민사관를 정립한 쓰다 소키치가 있다. 그는 일제의 대표적 황국사관 이론가로 임나일본부설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태두泰斗로 추앙받던 이병도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할 때 가르친 스승이다. 쓰다 소키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만들기 위해 김부식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창작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4세기 이전 한반도에 신라, 백제, 가야가 존재하지 않았고 4~6세기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내었다.

    식민사관의 틀, 반도사관

    -대한사관·대륙사관을 없애고 소한사관·반도사관으로 몰아넣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역사에서 중점적으로 축소, 조작한 부분이 대륙사이다. 이때 조작의 증거를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역사, 문화가 담긴 51종 20만 권을 압수하고 소각시키고, 주요한 문헌은 일제 황궁도서관인 정창원으로 가져가거나 개인 연구물로 탈취했다. 한일 간의 중요한 고대 역사의 통로인 대마도對馬島의 역사도 지우기 위해 대마도 도주의 집에 소장된 수만 권의 사서를 압수했다. 조선의 역사가 한반도를 벗어날 수 없도록 1차 사료부터 철저히 인멸한 것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단군조선사, 발해사, 대한제국사를 고의로 누락하였다. 조선사 서술의 핵심은 ‘조선인은 주체적 의식이 없는 민족으로, 고대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속국으로서, 사대주의로 일관했다. 결국은 나라가 망해 역사와 문화가 발전한 일본의 통치 아래 잘 살게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단군조선의 기원인 『삼국유사』에 기록된 환국-신시-단군조선의 역사를 환인-환웅-단군의 3대 가족사로 조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곰과 호랑이 이야기다. 유학자들이 틀 잡아 놓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중에서 위만조선을 강력하게 조명하여 ‘옛 조선은 이민족인 위만과 한사군의 지배로 시작되는 식민지배의 역사이므로, 지금의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핵심 역사논리로 만들었다.



    드러나는 역사 진실

    한반도의 북쪽은 중국 식민지인 한사군이, 남쪽은 일본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어 지배했다는 것이 한국 고대사 날조의 핵심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출발을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 역사로 만들기 위해 위만조선을 강조하고, 한사군의 중심지를 평안도 평양으로 비정하며 왕검성의 위치를 못 박았다. 그리하여 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위만조선이 들어섰으며, 뒤이어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어 한국사의 출발은 중국의 지배로부터 시작된 역사로 왜곡하였다. 이 한반도 한사군설은 지금도 한국사학계의 흔들림 없는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또 한반도 남쪽의 백제, 신라는 초기 건국 시기에는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일본(왜)이 가야 땅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신라와 백제까지 무려 200여 년간 지배하였다고 왜곡하였다.

    그러나 ‘기자조선 수도=위만조선 수도=낙랑군=평양 왕검성’의 식민사학 틀을 용기 있는 한 역사학자가 하루아침에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동안 이 학설을 신봉하여 오던 영남대 정인성 교수가 그동안 불문율처럼 여겨진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정인성 교수는 “현재 평양성은 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될 수 없는 곳이다. 오히려 요동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발표하여 조선총독부 이후 그 누구도 문제 삼지 못했던 ‘통설’을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계속해서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에서 암기식으로 외우고 믿던 한사군과 낙랑군의 위치가 지금 한국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북경 근처 삼장합에서 발굴된 낙랑군 조선현 사람의 무덤은 낙랑군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에서 북경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평양 낙랑군을 주장하던 강단사학계는 교치설僑置說까지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 교치설은 이미 조선총독부 시절 이마니시 류가 주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교치설이란 서기 313년 평양에 있었던 한나라 식민기관 낙랑군이 요서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조선 > 기자조선
    일본이 내세우는 조선 > 위만조선
    북한이 내세우는 조선 >단군조선
    한국이 내세우는 조선 > 단군은 신화, 위만조선·한사군

    조선총독부 직속 조선사편수회는 중국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라고 확정지었다. 한국사는 식민지의 역사로 시작되었으니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적 귀결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해방 후에도 친일 청산에 실패하면서 이런 식민사관, 조선총독부 사관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이덕일, 『한국 고대사, 끝나지 않은 전쟁』 참조)최근에는 평양의 낙랑군 유물을 가장 많이 발굴하고 평양 낙랑군설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한 신의 손 세키노 다다시의 일기장이 발견되어 또 다시 충격을 주었다. 그는 평양 발굴 낙랑군 유물에 관한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일종의 양심 고백인 것이다. 일기에 따르면 낙랑군 유물을 평양 현지에서 발굴하지 않고 북경의 유리창 골동품 가게에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북한 역사학자들 역시 평양의 유물은 한나라 유적과 관계가 없다고 하고 평양낙랑군설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


    조선총독부가 만들려 한 한국인의 모습

    조선사편수회가 심고자 한 식민사관의 이 두 가지 틀은, 한국사(조선사)는 건국 시기부터 주체적인 국가 건설은 없었고 식민 지배를 받았으므로 태생부터 식민지 백성이라는 것을 심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역사 DNA를 조작하는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 속에 녹아 있는, 역사 논리는 한민족이 자율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능력도 없고, 서로 당파 싸움이나 일삼는 한심한 민족이기 때문에 역사 문명이 앞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해 주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

    -대정 7년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 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부터 유리창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北京 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


    광복 후에도 한국의 주류사학이 된 식민사학

    대일 항쟁기에 신채호, 정인보, 박은식 등 수많은 분들이 독립운동과 더불어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에 대응하여 대한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은 총칼보다 무섭게 조선인들의 역사 DNA를 빠른 속도로 파괴해 들어갔다. 광복 후 이념전쟁으로 좌우가 나뉘면서 역사학계도 갈라졌다. 조선사편수회의 학맥을 이은 이들은 그동안 대한사관을 정립한 인물들에게 ‘재야’라는 프레임을 씌워 아마추어 국수주의 민족주의 사학으로 폄하하고, 자신들이 정통 역사학자임을 자처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 요직을 점령하였다. 최근에는 젊은 박사급 인물들을 길러 민족사학을 유사사학이라 공격하는, 일제 치하보다 악랄한 식민사학의 맥을 키우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한국사 인식

    올해는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한 수많은 선열의 독립운동과 희생으로 나라는 광복되었다. 그분들이 지키고자 한 대한의 역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역사적 힘이 그분들로 하여금 모든 걸 희생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 두 가지 소중한 사료를 제시한다. 하나는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23주년이 되던 1942년 3.1절에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이고 또 하나는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국독립당(재 중국)이 1936년에 발표한 글이다.


    “우리 민족은 처음 환국桓國이 창립된 이래 단군檀君·부여扶餘·삼한三韓·삼국三國·고려高麗·조선朝鮮 및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거쳐 5천 년의 국가 주권은 한민족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한국 강토에 근거해 서로 물려주면서 큰 난리를 겪어도 우뚝하게 독립하였고 민족의 광채를 보전하며 백 번 전쟁에 분발하여 시종일관하였고 전국가全國家의 인격을 보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3주년 3·1절 선언문(1942. 3. 1)


    “환국桓國에서 삼한三韓이 끝나기까지 무릇 3천여 년, 삼국(신라·고구려·백제)에서 신라 말까지 무릇 1천 년, 왕씨 고려로부터 이씨 조선은 각 5백여 년 지속되어 모두 5천 년이었다. 이씨 조선은 임신년(서력 1392년)부터 갑오년(서력 1894년)까지 조선이라 칭하였고, 갑오년부터 정유년까지는 대조선국, 정유년(서력 1897년)부터 경술년(서력 1910년)까지는 대한제국이라 칭하였다. 이처럼 환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까지 우리의 국맥은 상하 5천 년을 이어오면서 단 한 차례도 단절됨이 없었다. 재중국在中國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역사 인식 한망韓亡 26주년週年 통언痛言(1936. 8. 29)


    상해임시정부 3.1절 선언문과 재 중국 한국독립당의 통언은 “환국으로부터 대한민국까지 한 차례도 단절됨이 없이 전 국가의 인격을 보전하였다.”는 자부심과 확신으로 꽉 들어차 있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을 보라. 독립운동가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대한민국 역사관은 현재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에게 ‘유사·사이비’ 사학이라 공격당하는 그 ‘대한사관’이었다. 아직도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조선총독부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의 틀 속에 있다. 혼이 죽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우리의 뿌리 역사와 원형문화를 식민사관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다. 참다운 역사광복의 출발은 올바른 사관의 정립에 있다. 그것은 역사를 찾고자 하는 바른 국민들이 이룰 수 있다.

    대한의 뿌리 역사를 되찾아 대한의 미래를 열어가는 한국인,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역사 혼을 되찾는 대한사랑과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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