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그인/회원가입
기사목록

    [역사왜곡]

    『환단고기』 위서론과 식민사학 비판

    환단고기가 완전 조작이라고?

    정규철 기자


    민족사학 죽이기에 나선 한국의 역사학계

    현재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민족의 역사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왜곡한 식민사학을 답습하는 부류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서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활동에 매우 소극적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 왜곡은 그 영향이 미미하며, 중국이 진행 하는 동북공정은 우려할 것이 못 된다는 안일한 주장을 펼친다.


    최근에는 민족사학과 재야 사학을 ‘유사 역사학’ 또는 ‘사이비 역사학’이라는 비학문적 술어를 써 가면서 매도하고 있고, 그들의 학문 역량을 총동원하여 민족사학 죽이기에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이용하여 젊은 사학도들이 우리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면 자기들의 학설을 따르지 않는다고 배척하며 강단에 설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또 대학에서 자신들의 식민사학과 달리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들에 대해서는 ‘재야 사학자’ 또는 ‘사이비 역사학자’로 몰아 학계에서 쫓아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쓰고 있다.

    이러한 식민사학자들의 횡포 때문에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민족사학자들은 적지 않은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면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유사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원래 ‘유사類似’라는 말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민족 종교를 사교邪敎로 취급하여 ‘유사 종교’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식민사학자들은 지금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사용했던 술어를 차용하여 우리의 웅혼했던 역사 정신을 되살리려는 민족사학을 사이비 내지는 삿되고 진실이 없는 반지성주의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사 역사학’이란 말은 식민사학계가 민족사학을 배척하기 위해 악의를 가지고 차용한 식민제국주의 술어일 뿐이다.


    식민사학자들은 민족사학을 연구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신채호申采浩나 정인보鄭寅普, 김교헌金敎獻 같은 분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맥을 잇기보다는 그분들의 역사학은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뿐 학문적으로는 가치가 적다고 폄하한다. 오히려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데 힘쓴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체계적이고 학술적 가치가 높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한국사 말살을 위해 설치했던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이 옳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술 더 떠서 민족사학을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치즘이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 사관과 같은 위험한 사관이라고 오도한다.

    한국사는 민족사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세계사라는 큰 틀에서 서술해야 한다며 자신들의 식민사관을 교묘하게 감추려 하고 있다. 지금 세계는, 선진국은 물론 대부분의 나라들이 국민통합이라는 목표를 갖고 자국 역사의 가치를 높이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식민사학이 주도하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이런 흐름을 감추고, 우리 역사는 중국 문화의 영향 아래서 성장해 왔으므로 위대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대주의 사관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환단고기』와 위서론

    이들이 민족사학을 ‘사이비 역사학’ 운운하며 일본 제국주의 시절보다도 더 혐오하고 탄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중심에는 식민사학을 송두리째 뒤엎을 수 있는 민족사서 『환단고기』가 있다. 『환단고기』는 왜곡된 우리 역사의 진실을 소상히 밝혀 주고 있어,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학계가 식민사관을 그대로 추종해 왔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식민사학계가 누려 온 학문적 위상과 권력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환단고기』는 그들이 반드시 없애야 할 눈엣가시와 같은 책이요, 『환단고기』가 담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 민족사학은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와 국통 맥을 밝혀 줄 사서들이 중국과 일본 등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정통 사서가 바로 『환단고기』이다.


    또한 중국과 일본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서로, 동북아 역사의 진실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땅의 주류 강단사학자들은 실증사학을 부르짖으면서도, 짧게는 1백 년 전에서 길게는 수천 년 전부터 유적지로 보존돼 내려온 곳을 답사조차 하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환단고기』에서 사용한 몇몇 술어와 문구만을 트집 잡아 『환단고기』를 부정한다. 이로 인해 많은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 일부 국민들까지 일본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뿌려 놓은 『환단고기』 위서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떠들고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는 정말 이유립이 혼자서 만들어 낸 위서일까? 『환단고기』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여타의 사서에 없거나 그동안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를 위작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간은 일반인이 전문서적을 구하기 쉽지 않던 시절인데 이유립은 어디서 그 많은 책들을 구해 읽었고, 전문 역사학자들도 잘 몰랐던 내용들만 어떻게 꼭 집어 찾아내 『환단고기』를 엮을 수 있었을까? 더구나 「삼신오제본기」나 「소도경전본훈」 등에 담긴 심오한 사상과 철학적인 내용을 과연 이유립이 창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만 가져도 절대로 한 사람이 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이러한 단순한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고 오직 제 주장만 펼치고 있다.


    또 『환단고기』를 구성하고 있는 각 권마다 같은 시대 기록이 서로 달리 표현되거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서론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트집 잡아 위서라고 주장하면서 이유립이 일부러 이야기를 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앞뒤가 안 맞는 주장을 한다. 이유립이 과연 일부러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른 책들을 인용해서 책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일부러 내용을 달리하여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는 책을 만든다는 것은 소설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이유립李裕岦이, 계연수桂延壽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평생을 『환단고기』 위작에 힘썼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이유립은 1980년에 『환단고기』의 원문에 현토하고 주석을 붙인 『환단고기정해』를 발표하였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이유립도 『환단고기』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잘 모르겠다고 한 표현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이유립 자신이 만든 책이라면 왜 잘 모르겠다고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한다. 바로 그가 지어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는 많은 역사서의 내용들이 인용되어 있는데 일부는 원문과 글자가 다르거나 변형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만약 이유립이 위작을 하려 했다면 오히려 정확하게 인용하는 게 상식이다. 이유립은 원전과 차이가 나거나 문맥에 문제가 있을 경우 『환단고기정해』에서 원문 글자를 고친다고 주석에서 밝혔다. 따라서 이유립이 오랫동안 『환단고기』를 연구하며 일부 교정을 봤다고 보는 것이 가장 순리적인 판단이다. 『환단고기』 위서론 논리와 문제점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 관련 사실들을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 미리 위서로 결론을 낸 상태에서 이구동성으로 일방적인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환단고기』에는 세계, 국가, 산업, 문화, 자유, 평등, 인류 등의 술어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근대 술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술어들은 실제로 2천 년 전의 옛 문헌들에서도 사용되었다. 설령 몇몇 술어가 근대어라 할지라도 계연수가 근대 인물이기 때문에 『환단고기』 원문을 옮겨 쓰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책의 편집 과정을 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이고, 또 몇 개에 불과한 술어라 극히 부분적인 문제일 뿐이다. 또 위서론자들은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청나라 시조와 관련되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청나라 이후에 꾸며진 위서라는 일관된 주장을 해왔는데, 중국 문헌에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설득력이 없다.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 두 사람의 『삼성기』는 『조선왕조실록』 초기 기록에 명확하게 나옴에도 불구하고 70년이나 후대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해주海州조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이라는 비슷한 이름의 세 사람이 나오므로 『환단고기』는 위서라고 것이다. 이것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앞 시대의 실록이 틀렸고 후대의 문헌이 맞다는 주장인데, 서지학의 기본을 무시한 억지에 불과하다.주류사학계에서 주장하는 『환단고기』 위서 주장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생출판의 『환단고기』 역주본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이 충분한 논거를 바탕으로 많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일방적 주장을 내세우며 자신들만이 역사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일관할 뿐이다. 학문세계에서 하나의 문제를 놓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논리와 결과를 말한다는 것은 서로 약속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환단고기』는 위서인가? 일반적으로 필사하는 과정에서는 글자나 문장을 잘못 옮겨 적는 경우가 많다. 『환단고기』도 필사 과정에서 생긴 착오가 일부 있다. 이유립이 「자유」지 등에 기고한 글도 편집 오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환단고기』 원본이 분실되어 사본만 남았기 때문에 그 사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유립이 밝힌 바에 의하면 『환단고기』 진본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분실된 상태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복원했다고 한다. 우리 선인들이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을 주註까지 암기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환단고기』를 복원하는 것이 그다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실제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인 『상서尙書』(서경書經)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복생伏生의 기억에 의해 전수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논어』도 노나라에서 전해진 『노논어魯論語』와 제나라 사람이 전한 『제논어齊論語』가 합쳐진 이후 여러 사람의 편집 과정을 거쳐 후한 말에 오늘날의 『논어』가 성립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사람들이 『논어』를 위서라 하지 않는다.

    상생문화연구소 고문헌연구실 이재석 박사는 환단고기 추천사에서 “자구字句를 수정한 문제도 그렇다. 『논어』를 놓고 볼 때, 한나라 이래 『논어』를 집대성한 위魏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論語集解』는 후에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와 청대의 『논어』 주석서에 저본이 될 정도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이 『논어집해』와 청나라 말에 여서창黎庶昌이 집록한 『고일총서古逸叢書』본에 수록된 『논어집해』에는 서로 다른 자구가 수없이 많다. 그럼 저본이 된 『논어집해』는 진서이고 『고일총서』본은 가짜인가? 게다가 근래에 돈황敦煌 투르판吐魯番 지역에서 발견된 『논어』의 사본은 지금 통행본 『논어』와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예는 고문헌에서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므로 이런 작은 오류를 구실 삼아 『환단고기』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영어 속담처럼 ‘목욕통의 물과 함께 아기를 버리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식민사학계의 『환단고기』 위서 만들기

    식민사학계는 그동안 『환단고기』 위서론을 펼친 조인성 교수의 한계가 드러나자, 이문영이라는 무명 소설가를 『환단고기』 위서론 전문가로 내세워 민족사학 죽이기를 자행하고 있다. 이문영은 자신의 글에서 재야 사학자들은 체계적인 역사 훈련도 받지 않은 비전문가라며 역사 연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맹비난해 왔으며, 심지어 윤내현 교수라든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이덕일 박사까지도 ‘재야사학자’ 곧 ‘사이비역사학자’라고 비방해 왔다. 그런데 정작 이문영은 학부 출신으로 체계적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비전문가이다. 따라서 그도 역시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해야 하는데, 정작 자신이 재야 사학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다.

    이문영은 『환단고기』가 전해진 과정과 전수자 이유립의 생애를 잘 모를 뿐만 아니라 『환단고기』 전체를 깊이 연구한 것도 아니다. 이렇다 보니 진지하게 분석하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소설가다운 상상력으로 추측한 것을 사실인양 표현하거나 이유립에 대한 인신공격성 글로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만 보아도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인물의 부적절한 글을 유력 학술지에 실어 주고 강사로 내세우는 주류사학계는 국민들을 속이고 우리 역사를 망치는 주범이자 식민사학 집단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환단고기』 출간 과정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오형기吳炯基가 1949년에 『환단고기』를 정서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강화도 대시전大始殿이 1969년에 건축되었기 때문에 오형기가 1949년 대영절大迎節에 대시전에서 이유립의 부탁을 받고 『환단고기』를 정서하였다는 환단고기 발문 내용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화도에 대시전이 건립된 1969년 이전에는 단단학회檀檀學會에서 제천행사 때 쓰던 작은 임시 건물이 있었는데 현판만 없었을 뿐 그때에도 대시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유립의 제자들 증언에 의하면, 1979년에 간행된 ‘광오이해사본光吾理解社本’은 오형기가 1949년에 정서한 필사본을 그대로 영인한 것이 아니다.

    이유립의 제자 조병윤趙炳允은 스승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대표로 하여 몰래 광오이해사에서 『환단고기』를 출판할 때, 출간에 적합한 사본을 만들기 위해 오형기에게 필경筆耕을 요청하여 제작하였다. 오형기는 이유립이 ‘배달의숙본’을 간행할 때에도 필경을 담당하였다. 광오이해사에서는 『환단고기』를 1979년 9월과 12월 두 차례 간행하였으며 보급판 외에 고급 대형판도 출간하였다. 그러나 광오이해사본은 급히 제작하다 보니 잘못 필사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1979년 12월 재판에서는 잘못된 부분을 정정한 오류표를 붙여 출간하였다. 이해에 이유립은 이러한 광오이해사본의 오류를 고쳐서 새로 판본을 만들었으나 출판비가 없어 1980년에 배달의숙 이름으로 정식 출간하였다.

    『환단고기』는 소중한 민족사서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위서론자들이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둘째,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으며, 셋째,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이다. 『환단고기』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환단고기』 저자들만큼 높은 학덕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 법이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저자들의 신관과 인간관, 우주론과 역사관의 언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판만 일삼는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만들기 위한 목적에만 급급하여 『환단고기』 원문은 물론 『환단고기정해』조차 정독하지 않고 자신들이 공격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문구만 골라 일방적으로 결론지어 버린다. 『환단고기』를 비판하는 더욱 본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밥그릇, 식민사학이 붕괴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달과 직결된 식민사학의 아성을 방어하기 위해 『환단고기』를 매도하고 헐뜯는 것이다. 이유립은 일찌감치 한국사 되찾기 운동을 펼치면서 우리 역사학계가 완고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절감하였다. 1980년에 『환단고기』를 공개하라는 계연수의 유명도 있었겠지만 이런 풍토 때문에도 이유립은 『환단고기』의 공개를 주저한 것으로 생각된다. 『환단고기』에 작은 착오와 오류가 있다고 해서, 천 년에 걸쳐 쓰인 이 귀중한 사서를 위서로 몰아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사목록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