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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천인갱, 군함도의 비극]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김남운 대한사랑 기자

    ▣ 일본 군국주의 망령이 아직도 한국에 살아있다.

    2019년은 3.1독립만세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새로운 나라를 열고자 자주적으로 일어섰던 1919년으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이루었는가?

    최근 한국 대법원이 판결한 일본의 강제 징용 배상과 관련해 일본 아베 정권은 핵심 물자 수출 규제를 통한 무역전쟁으로 보복해 왔다. 그동안 일본에 의존해 온 한국의 산업경제는 체질 개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가 경제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동안 한국 사회의 각 분야에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던 친일 식민잔재의 독버섯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지금 한국은 과거의 친일역사를 청산하고 일제의 역사왜곡으로 잃어버린 시원역사를 찾아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

    지금 동북아 한중일의 국제정세는 구한말과 놀랍도록 닮았다. 중국은 개방ㆍ개혁을 통해 세계경제의 굴뚝이 되어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현재 중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화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세계 곳곳에서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과 전 세계를 잇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그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중의 정치ㆍ경제ㆍ안보 등 전방위적인 충돌로 긴장감이 높아지며 일본도 자국의 안보를 담보로 2020년까지 평화헌법 개정을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제국의 유산인 좌우 이념대립에 갇혀 내부분열로 신음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역사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치며 한국인의 창세역사와 원형문화가 완전히 파괴되어 민족정신의 구심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난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잊지 않고 새길 때 한국사회가 나아갈 미래 청사진을 제대로 구상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날의 역사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맞아 죽은 한국인이 천 명이 묻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천인갱!

    2001년 3월 1일, MBC가 창사 40주년 기념으로 특별 방영한 ‘하이난섬(해남도)의 대학살’에서는 조선인이 천 명 이상 집단 학살된 ‘천인갱’ 사건을 심층 취재했다.

    천인갱은 중국의 하이난섬에 있다. 하이난섬 마을에 사는 증언자들은 취재 당시 50여 년 전의 학살사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인 천 명의 시신이 암매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철사로 묶어서 개ㆍ돼지를 도축하듯이 때려죽였다는 것이다. 죽인 다음 구덩이를 파고 일렬로 쭉 묻어 나갔다고 한다.

    천 명이 묻힌 구덩이란 뜻의 ‘천인갱’, 한국인으로서 하이난섬으로 이민을 해서 농업을 하는 서재홍 씨는 중국대 발굴팀의 도움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허락을 얻어 비석을 어렵게 세운 서재홍 씨는 결국 1년 넘게 관공서를 쫓아다닌 끝에 발굴 허가를 얻어내게 됐다. 발굴하기 전 이들을 위한 추모제를 올리고 발굴을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천인갱 이야기를 들어 온 마을 주민들이 발굴을 도와주었다. 3시간 이상 작업을 하던 중, 하얀 인골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처음 발굴된 두골에서 구멍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곡괭이로 찍혀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서재홍 씨는 이 유골을 보고 당시 처참하게 죽은 한국 동포의 비참한 삶을 회상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민초들은 일제의 희생에 맥없이 당하면서도 저항을 하지 못하는 슬픈 처지였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이난섬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였다. 남방진출이 용이한 지정학적 위치와 풍부한 자원으로 일본군은 하이난섬을 거대한 침략기지로 만들어 나갔다. 그러기 위해 노동력 확보가 필요했고, 식민지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끌고 와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들은 감독관들의 엄중한 감시 하에 심하게 구타를 당하며 노역을 하였다. 증언자들은 굵은 몽둥이로 일본군에게 맞아가며 노역에 시달리던 당시 장면을 그대로 회고했다. 그들이 기력이 떨어지면 나무에 매달아 놓고 돌아가면서 구타를 했다고 한다. 조선인들은 나무 위로 끌어 올려져 초죽음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나라를 잃은 우리 형제동포들은 이렇게 희생되었다. 나무마다 조선인을 매달아 나중에는 나무에 조선인을 매달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매 맞는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마을에 메아리쳤고 산채로도 불태워져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12살이던 중국인 주학권 씨는 그날의 목격담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는 증언을 하면서 눈물을 닦아 내렸다. 어린 나이에 목격한 이 사건은 그에게 끔찍한 기억이었다. 발굴 이틀째 무더기로 유골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조선인의 유골들이었다. 유골들의 상태로 봐서 참혹하게 학살을 당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유골에서 수첩이 발견되었다. 인쇄된 글씨가 뚜렷이 보이는 징병검사 날짜, 입영 날짜가 적힌 일본군 수첩이었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확실한 물증이었다. 이날 발굴에는 일본시민단체의 재일교포 김정민 씨와 동아시아 연구가인 일본인 사토 씨도 참여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국인 강제 징용자 문제를 연구해 왔다. 일제의 가혹 행위를 보면서 잔혹한 사진을 수없이 봐 왔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발굴현장의 참담함을 보고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유골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말로만 듣던 ‘천인갱’은 뜬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화려한 번영의 뒷모습엔 약소국의 영토, 백성, 자원을 수탈한 강권으로 쌓아 올린 부가 놓여 있다. 1943년 2천 명의 조선인 죄수들이 하이난섬으로 끌려갔다. 형기를 단축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인 보국대에 강제 동원되었던 표태순 씨는 1943년 평소 알던 일본인 식모가 준 헌옷을 팔러 전당포에 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 10개월 형을 받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거짓말을 했다. “지금 가는 사람들은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을 뽑아서 보내니까 사고 내지 말라고 했다.”라고 한다. 해남도로 끌려간 사람들은 형기가 짧고 신체가 건강한 모범수였고 대부분 죄수들이 젊었다고 한다.

    당시 해남도로 파견된 형무관 이문석의 아들 이승웅 씨 증언에 의하면 당시 25명 정도의 형무관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죄수들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10일 정도 항해 끝에 하이난섬에 도착했다. 죄수들의 주 노역 장소는 석록광산과 삼아항 일대였다고 한다. 석록광산에는 순도 95프로의 질 좋은 철광석이 4억 톤이나 매장되어 있었다.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전쟁물자 제조가 필요했던 일제는 하이난섬의 철광석을 약탈했다.

    죄수들은 삼아 비행장과 공항을 만드는 데도 투입됐다. 도로와 항구, 대부분 기반시설이 죄수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탈출을 시도하다 걸리면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주먹밥이 하루 식사였다. 혹독한 배고픔을 참다못한 죄수들은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서 인가에 가서 밥을 구걸했으나 밥을 주다 걸리면 주민들이 구타를 당했다고 증언하였다. 하이난섬은 그 자체가 거대한 감옥이었다. 죄수들은 주변의 풀을 뜯어먹으며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하이난섬에서 강제 노역을 했던 표태순 씨는 ‘한국에 나가서 하얀 쌀밥을 한 그릇만 먹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여겼던 과거를 회상하였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 당하자 일본군은 조선인 죄수 천 명 이상을 학살했다. 패망이 가까이 오자 삼아항에 가까운 조선촌으로 조선인을 불러 모았다. 최후의 항전기지를 만들고 패망이 확실해지자 조선인 죄수들을 학살했다. 전범 재판에 대비해서 증언자들을 없애고 증거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죄수들에 대한 가혹한 학대 그리고 학살로 이어진 하이난섬에서 일어난 일제의 전쟁 범죄를 지금도 목격자들이 생생히 살아서 증언하고 있다.

    일제가 처참히 유린시킨, 조선인의 삶을 노래한 1948년 일본의 저항 시인인 쓰보이 시게지의 시를 보자.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빼앗기고 끝내 생명마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 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네!”〈십오엔 오십전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10만 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제는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폭도를 계획 중이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더불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경찰과 군인, 일부 시민으로 구성된 자경단을 조직하여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본인과 조선인 구별법이 조선인이 발음하기 힘든 ‘십오엔 오십전을 말해 보라’라거나 ‘기미가요를 불러보라’고 하여 머뭇거리거나 발음이 시원치 않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이렇게 학살된 조선인이 6천여 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와 경찰이 학살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모두 은폐하고 민간인 자경단에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자경단마저도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대부분 석방을 하게 된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경제적 부국 외에도 정의와 인애, 평화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국가 이념과 국민의식으로 자리 잡혔을 때를 말한다. 그러나 일본은 잘사는 나라일지는 몰라도 정의로운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의 대표적 현장인 군함도! 군함도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유네스코는 군함도의 어두운 이면과 강제 동원의 진실까지 공개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네스코 등재 결정이 나온 바로 다음 날 일본 정부는 돌변했다.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 동원과 노역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강제 노역의 사실을 알리는 산업유산정보센터 건립 조건을 2019년인 지금까지 이행하지 않은 채 국제사회를 기만하고 무시하다가,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아지자 군함도 현장이 아닌 1천 킬로 떨어진 도쿄에 정보센터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군함도 문화유산에서 떨어진 곳에 설립함으로써 국제 비판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과거를 지우겠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이다.

    일본은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나라다.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그 속에서 이루어진 침략과 억압의 역사는 지우고 부정한다. 일본 정부는 강제 징용, 위안부도 없었다고 말한다. 지옥의 섬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삶, 그 증인들이 당시의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증언을 부정하고 있다. 2015년 일본은 군함도를 포함해 메이지유신의 산업혁명 유산이란 명분으로 23곳을 유네스코에 등재를 신청했다. 이 중에는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 학당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아베 총리는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고 했다. 아베의 일본 정부가 역사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분명해진 것이다.

    전 서울대 교수였고 현 낙성대 경제연구소 소장이자 이승만 학당의 원장인 이영훈 씨는 일제에 의한 강제 노동도 없었고 위안부도 없었다고,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을 강변한다. 그의 주장은 일제의 강제 동원과 수탈에 대한 객관적 사료와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한국의 발전을 도운 고마운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살아서 피해를 입은 사실을 명백히 증언하는 이들은 뭐란 말인가. 국가 제일주의자로 제국주의와 강대국의 입장만 대변하고 제국주의에 희생된 약소국의 주권과 백성들의 자유와 정의, 가치, 인륜과 도덕을 무시하는 기형적 가치관의 소유자라 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세의 침략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외세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이 있기 때문이다.

    머나먼 이국땅에 끌려와서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던 나라 잃은 백성들은 지금도 깊은 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에 기대어 부귀를 누려온 매국세력의 2세, 3세 후손들이 수탈의 역사를 은폐하고, 고난의 삶을 살았던 조선의 힘없는 백성들의 삶을 왜곡하고 있다.

    이영훈 씨는 최근에 『반일 종족주의』란 책의 출간과 더불어 반일종족주의 공동저자들과 전국을 돌면서 ‘반일 종족주의 북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영훈 씨의 은사는 뉴라이트의 대부大父인 안병직 교수이다. 이 책의 저자들과 북 콘서트에 참여한 인물들은 일제 식민지 근대화론을 찬양하면서 현재 일본의 경제도발을 두둔한다. 이들은 식민 지배를 위해 일본의 국가 정책으로 범한 국가 범죄를 옹호하고 있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우연 위원은 유엔 학술대회에서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았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는 일본 국회에서, 한국에서 합리적인 시민들과 힘을 합쳐 강제 징용 노동자상을 철거하고 싶다고 발표했다. 이런 친일 인사들의 망언을 일본 언론에서는 박수치며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조선인 피해자들의 증언은 대부분 믿을 수 없고 조선인 노동자들이 밥을 많이 먹어서 배고픔에 시달렸다는 조롱에 가까운 발언을 한다. 일본인과 밥을 똑같이 주었는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밥을 많이 먹어서 상대적으로 배고픔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북 콘서트에 참여하여 자신을 대놓고 토착왜구라고 홍보를 한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의 극우단체와 아베 정권의 입장을 완벽히 대변한다.

    한국인들이 분노하는 것은 약자를 수탈하고 억압한 제국주의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 아베 정권의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이다. 필자의 바람은 과거에 대한 반성과 화해로 미래를 정의롭고 호혜적 관계로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해방은 미국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독립운동가들이 무슨 기여를 했느냐’고 하며 그들의 숭고한 정신과 가치를 일체 무시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치하에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일제와 절대 타협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인권이 억압받는 나라를 원하지 않았다. 인류 보편적 가치이자 한민족의 오랜 평화이념인 홍익인간 사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자신의 역사주권을 회복하여 정의가 실현되고 국민의 자유가 실현되어 스스로 국가 운명을 열어나가는 주체가 되고자 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 이게 자조 섞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의가 구현될 리가 없다. 이런 나라에서, 조국이 위태로울 때 누가 앞장서서 나라에 헌신하겠는가.

    지금은, 일제 식민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친일을 해야 했던 시대도 아니다. 그런데 스스로 종일주의자가 되어 일본 국우세력보다 더한 신친일파의 부활과 활보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정의가 살아있는 국가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다.

    이제 식민 지배를 위해 일제가 왜곡 말살한 식민사학을 청산하고, 이 나라의 역사 정의를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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