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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지명 이동으로 역사 강역을 넓힌 중국

    성헌식 고구려문화보존회 학술위원장

    2010년 베이징 소재 징화(京華)학교의 역사교사였던 위안텅페이(袁騰飛)는 “일본도 역사교과서를 왜곡한다지만 중국만큼은 아니다.”면서 “중국 역사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중 진실은 5%도 안 되고 나머지는 완전 허구다.”라고 말해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즉 중국 역사의 95%는 비한족(동이)에게서 가져가 자기네 것으로 위장했다는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대 중국의 영토 역시 지금의 약 5% 정도에 불과한 섬서성과 하남성의 황하 주변 일부뿐이었다. 서울로 비유하자면 용산·강남·서초 정도가 하화족·한족의 땅이었고, 나머지 서울은 모두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다. 그래서 하화족들이 명재상 이윤(伊尹)의 스승인 유위자(有爲子)에게서 중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공자의 7대손인 공빈이 쓴 <동이열전>에 기록된 문구.

    이러한 사실은 맹자의 ‘공손축장구(公孫丑章句)’의 “하·은·주의 전성기에도 땅이 천 리를 넘는 자가 없었는데”라는 문구와 ‘만장장구 하(萬章章句 下)’의 “천자의 땅은 사방 천 리이고, 공과 후는 모두 사방 백 리이며, 백은 칠십 리이고, 자와 남은 오십 리이니 무릇 네 등급이다.”라는 문장이 입증해주고 있다.

    또한 『한서지리지』의 초반부 ‘도견급기(道汧及岐)’에 단 안사고의 주에 의하면, 뢰수(雷首), 포판(蒲阪), 지주(厎柱)와 석성(析城)은 왕옥(王屋)까지, 태항(太行)과 항산(恒山)은 갈석(碣石)에 이르러 해(海)로 들어간다고 한다. 아래 <대청광여도>에서 보듯이 주를 단 대부분 다른 지명들이 산서성 남단에 있다면 갈석산은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壺口、雷首,至于大嶽;師古曰:「自壺口、雷首而至大嶽也。雷首在河東蒲阪南。大嶽即所謂嶽陽者。」 厎柱、析城,至于王屋;師古曰:「厎柱在陝縣東北,山在河中,形若柱也。析城山在濩澤西南。王屋山在垣縣東北。」 太行、恒山,至于碣石,入于海。師古曰:「太行山在河內山陽西北。恒山在上曲陽西北。言二山連延,東北接碣石而入于海。

    이러한 갈석산을 식민사학자 이병도 박사는 <한국고대사연구> ‘낙랑군고’ 에서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했다. 그가 고대 한·중 국경을 황해도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 이유는 낙랑군 수성(遂成)현과 수(遂) 자가 같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또한 수양제와 당태종이 요동정벌 중에 갈석산에 올랐다고 하는데, 만주에서 전쟁하던 그들이 어떻게 고구려 평양성의 한참 뒤(남쪽)에 있는, 이병도 박사가 비정한 황해도 수안 갈석산을 등정했다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당시 최첨단 헬기나 드론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수성(遂城)현 …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요동(遼東)산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서지리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위 무제(조조)가 지은 시 ‘관창해(觀滄海)’에 대한 <중국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조조는 낙양의 북문에서 걸어가 갈석산에 올라가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낙양에서 걸어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갈석산이 어떻게 수천 리 떨어진 황해도 수안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이병도 박사의 황해도 수안 ‘갈석산설’은 아무 근거도 없는 엉터리 학설임을 알 수 있다.

    “관창해라는 제목은 후세 사람이 붙인 것이고, 원래는 ‘보출하문행’의 제1장으로, ‘롱서(隴西)행’이라고도 한다. 한락부 중 ‘상여가·금주곡’에 속한다. 하문은 원래 낙양 북면 서쪽 머리의 성문으로, 한나라 때 하문으로 칭했으며, 위·진 때는 대하문이라 칭했다. 조조의 이 작품을 ‘송서·락지’의 ‘대곡’에 넣어 제목을 ‘갈석보출하문행(碣石步出夏門行)’이라 지었다. 이 시는 건안 12년(207) 북쪽 오환(烏桓)을 정벌하고 승리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에 지었다.”


    <산서성 남단에 있는 갈석산 관련 지명들>

    우리 역사의 강역을 밝히는 핵심지명인 패수(浿水)는 <수경주>에 동쪽으로 흐르는 강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이병도 박사는 서쪽으로 흘러가는 청천강으로 비정했다. 이렇듯 식민사학의 지명 비정에는 동서남북과 상하좌우도 없고 사서의 기록도 필요 없다. 오로지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일본 제국주의 학자들이 전수해준 식민사학만이 그들의 바이블이다.

    패수는 지금까지 위치가 오리무중이었는데, 2년 전에 필자가 밝힌 패수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유주의 낙랑군에 속한 25개 현 중에 패수가 있다. 『위서』 「지형지」의 회주(懷州)에는 하내(河內)군과 무덕(武德)군이 있는데, 패수는 무덕군의 속현이다.

    ≪魏書≫卷106上 地形志2上 (怀州) 天安二年置,太和十八年罢,天平初复。领郡二县八 户二万一千七百四十 口九万八千三百一十五 (河内郡하내군) 汉高帝置。领县四 户九千九百五 口四万二千六百一 野王二汉、晋属,州、郡治。有太行山(태항산)、华岳神。沁水(심수)二汉、晋属,治沁城。有沁水, 济水。河阳二汉, 晋属, 后罢,孝昌中复。轵后汉、晋属,治轵城。有轵关。 (武德郡무덕군) 天平初分河内置。领县四 户一万一千八百三十五 口五万五千七百一十四。平皋二汉、晋属河内。有平皋陂、平皋城、安昌城。温二汉、晋属河内。有温、浿水(패수)。怀二汉、晋属河内。有长陵城、怀城。州二汉、晋属河内。有雍城、中都城、金城。

    회주의 속현들은 대부분 『한서』 「지리지」의 예주에 속한 하내군(河內郡)의 속현들로 모두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명들이다. 또한 『금사』 「지리지」권5 회주(懷州) 에서 한글로 병기된 태항산, 심수, 수무, 휘주, 무척, 천문산 등의 지명들은 ˹대청광여도˼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하내군 지명들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는 당연히 하내군 부근에 있어야 할 것이다. 회주와 예주의 하내군과 유주의 낙랑군의 패수와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漢書』‘地理志’ 河內郡(하내군),高帝元年為殷國,二年更名。莽曰後隊,屬司隷。戶二十四萬一千二百四十六,口百六萬七千九十七。縣十八:懷(회),有工官。莽曰河內。汲(급),武德(무덕),波,山陽(산양),東太行山在西北。河陽(하양),莽曰河亭。州,共,故國。北山,淇水所出,東至黎陽入河。平皐(평고),朝歌(조가),紂所都。周武王弟康叔所封,更名衞。莽曰雅歌。脩武(수무),溫(온),故國,己姓,蘇忿生所封也。壄王,太行山(태행산)在西北。衞元君為秦所奪,自濮陽徙此。莽曰平野。獲嘉,故汲之新中郷,武帝行過更名也。軹,沁水(심수),隆慮,國水東北至信成入張甲河,過郡三,行千八百四十里。有鐵官。蕩陰。蕩水東至內黃澤。西山,羑水所出,亦至內黃入蕩。有羑里城,西伯所拘也。

    (『金史』卷二十六 志第七 地理下) 懷州(회주)上,户八万六千七百五十六。縣四、鎮六:河內倚。有太行陘、太行山(태행산)、黃河(황하)、沁水(심수)、浿水(패수)。鎮四武德(무덕)、柏鄉、萬善、清化。修武(수무)有濁鹿城。鎮一承恩。山陽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為山陽縣,隸輝州(휘주)。武陟(무척)有太行山、天門山(천문산)、黃河、沁水。鎮一宋郭。



    <중국 사서별 패수에 대한 기록(좌), 산해경에 붙은 곽박의 주(우)> 도표 하단의 태행산은 태항산으로 교체

    『수경주』에 위만이 망명하면서 건넌 강으로 기록된 패수는, 『삼국지』 ‘집해 권30 「위서」 동이’에는 추수(溴水)로, 또 출판 본(本)에 따라 격수(湨水)로도 기록되어 있다. 3개 글자의 모양이 서로 너무 흡사해 혼동되어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산해경(山海经)』의 산경 남산 2경에 “동쪽 5백 리에 성산이 있고, 그 동쪽 5백 리에 회계산이 있는데 작수가 나와 남쪽으로 흘러 격(추)으로 들어간다. 역시 동쪽 5백 리에 이산이 있는데 격(추)수가 나오는 곳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곽박(郭璞)은 그 『산해경』의 湨(溴)에 ‘一作 浿’라는 주석을 달았다. 즉 하남성 제원(濟源)시를 흐르는 湨水(溴水)가 바로 浿水였던 것이다. 지금은 추하(溴河)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山经·南山经> 又东五百里曰成山(성산)。四方而三坛,其上多金玉,其下多青雘,????水出焉,而南流注于虖勺,其中多黄金。又东五百里曰会稽之山(회계산),四方。其上多金玉,其下多砆石。勺水出焉,而南流注于湨(격)。又东五百里曰夷山。无草木,多沙石,湨水(격수)出焉,而南流注于列涂。

    이렇듯 초라했던 한족의 영토는 명나라가 원나라 땅을 차지한 데다가, 청나라 때 만주·내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이 합쳐지면서 명나라 때보다 3배나 되는 지금의 중국 영토로 확정되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몽골과 여진이 고구려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민국이 집권하면서 그 땅을 그대로 넘겨받아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와 위구르에서 민족분쟁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나라는 영락제 때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지명 이동을 통한 역사 왜곡을 자행해 황하 주변에 있던 유주와 갈석산 등 한·중 경계 지명들을 북경 부근으로 옮겨 역사 강역을 크게 넓혔다. 이러한 지명 조작은 중화민국 때 그 극에 달했는데,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해 우리 민족사가 난도질당하던 때이므로 아직 채 백 년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광복된 나라에서 일제식민사학과 중화사대사학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제도권 사학으로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사학계의 청천강 패수설을 질타하는 민족사학계는 현재 5G 인터넷시대임에도 30년 전에 발표된 ‘패수 난하설’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다. 이래서야 어찌 뒤틀린 우리 역사가 환원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올바른 사관으로 재무장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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