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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기사]

    운초 계연수의 생애와 업적

    윤창열 (대전대학교 교수)

    [편집자 주] 올해는 『환단고기』의 저자 운초 계연수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나라의 흥망을 걱정하며 대한국사의 보물을 남기셨다. 계연수 선생님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금년 2020년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찬하여 한민족의 9천 년 역사를 밝히고 국통맥國統脈을 바로잡은 운초 계연수(1864~1920) 선생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계연수 선생은 독립운동에 평생 몸 바치셨는데 일제의 밀정에 의해 살해를 당하셨죠. 그는 해학 이기를 만나기 전 이미 안함로 『삼성기』, 원동중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세동의 『북부여기』 그리고 『참전계경』 등을 수집하였고, 1897년 경 이기李沂를 만난 이후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태백진훈』 『태백일사』 등을 전수 받았습니다.

    1898년에 『단군세기』를 출판했어요. 1899년에는 『태백일사』라는 역사서를 간행했어요. 그리고 홍익사서弘益四書를 최초로 간행한 분이 운초 계연수 선생입니다. 홍익사서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에 이암 선생이 쓴 『태백진훈』을 합쳐서 이유립 선생이 부른 명칭입니다. 1909년에는 해학 이기가 창립한 단학회檀學會에 참여하였고 그 해 이기李沂가 나라 잃은 것을 통분해서 절식絶食하여 자진自盡하자 단학회의 2대 회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섭니다. 1911년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원형정신, 문화, 철학 등이 담겨있는 『환단고기』를 간행하여 한민족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1912년에는, 일제에 의해 광개토태왕 비문의 글자가 마멸되기 전에 탁본을 뜬 무술등본에 근거하여 마멸된 글자 138자를 복원하여 광개토태왕이 대마도에 있는 임나가라를 거쳐 구주에 상륙한 이후 일본열도를 정복한 내용을 밝히는 『성릉비결자징실聖陵碑缺字徵實』을 발표하여 광개토태왕비의 진면목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1914년 천마산天摩山 제천대회祭天大會를 계기로 단학회취지문檀學會趣旨文을 발표하여 동지들의 서명을 받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1918년 겨울 단학회를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랍자紅石拉子로 이전하고 독립운동가들이 기숙하고 훈련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에 <단학회보檀學會報>를 간행하고 이후 8호까지 간행합니다. 석주 이상룡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920년 8월 15일 한간韓奸 감영극甘永極에게 피살되어 시신이 압록강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평생을 한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연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지만, 선생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포상도 받지 못하였으며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강단사학자들로부터 수안 계씨의 족보에 계연수라는 이름이 없다고 그의 존재마저 의심받고 있으며 이상룡과 관련된 기록 및 이상룡의 문집에 계연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유립이 지은 『대배달민족사』와 그가 간행한 「커발한」 잡지 그리고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여 위대한 민족사학자이며 한민족 고유심법의 전수자이며 불굴의 독립운동가이신 운초 계연수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밝혀 보고자 합니다.

    생애

    이유립이 지은 『환단고기정해桓檀古記正解』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계자桂子의 이름은 연수延壽이고 자는 인경仁卿, 호는 운초雲樵 또 다른 호는 일시당주인一始堂主人이니 그의 조상들은 선천宣川 사람이다. 고종 태황제 원년元年인 갑자(1864년) 5월 28일에 태어나 선천宣川에 거주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 백가百家의 서적을 섭렵함에 한 번 보면 즉시 암송하였고, 말년에 비로소 크게 깨쳤다. 어려서부터 명산名山과 승지勝地를 두루 찾아다녔고 도사道士와 이승異僧 등을 방문하였으며 더욱 힘을 기울여 정진수련精進修鍊하였고 환단桓檀 이래의 고유한 철학사상을 탐구하여 일가견一家見을 이루었다.


    후에 태천泰川의 진사 백관묵의 서당을 방문하여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三聖記』와 홍행촌수紅杏村叟가 지은 『단군세기』를 얻었고, 삭주朔州의 진사 이형식의 집을 방문하여 범세동이 지은 『북부여기北扶餘紀』와 『천리경穿理鏡』 의 서적을 얻었고, 해학海鶴 이기李沂를 스승으로 모셔 『태백진훈太白眞訓』,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얻었고 또 정주定州의 소호篠湖 이탁李沰으로부터 을파소乙巴素가 지은 『참전계경參佺戒經』을 얻었으니 모두 보배스러운 고전서적이었다. 광무光武 2년(1898년)에 『태백진훈』, 『단군세기』를 간행하고 다음해 기해己亥(1899년)에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를 간행하고 13년(1909년) 정월 1일에 해학 선생이 단학회檀學會 강령삼장綱領三章을 지으시고, 3월 16일에 단학회 창립을 마리산 참성단에서 고유告由하시었다.”

    운초 인생의 전환점은 해학海鶴 이기李沂와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기(1848~1909)는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함께 호남의 삼재三才라 불리운 사람으로 운초와는 16살 차이가 납니다. 신해년辛亥(1911년) 5월에 『환단고기』를 만주 요령성遼寧省 관전현寬甸縣에서 간행하였고, 임자壬子(1912년) 5월에 「성릉비문징실고聖陵碑文徵實考」를 발표하였습니다.

    갑인甲寅(1914년) 3월 16일에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이유립 선생의 부친), 석천石泉 최시흥崔時興 등 12인과 삭주朔州 천마산天摩山에 모여 제천祭天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칠 것을 혈맹血盟합니다. 이때부터 단학회가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1918년 백암白巖 홍범도洪範圖,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동의를 얻었고 동년 10월에 박응룡朴應龍, 정창화鄭昌和 등 14명이 발기문發起文에 추가 서명하였습니다. 동년 겨울에 단학회檀學會를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석랍자구紅石拉子區 홍석령紅石嶺 산 아래로 이전하고 (1919년에)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설치하고 이때부터 독립군을 양성하고 역사를 교육하게 됩니다. 그리고 3월부터 <단학회보檀學會報>를 간행합니다.

    기미己未(1919년) 3월에 대고산大孤山 항일시위抗日示威에 동참했고, 이해 3월 16일에 석주 이상룡, 홍범도, 여운형呂運亨, 신채호申采浩 등 모두 28인과 함께 서명署名하여 조선인朝鮮人 십보장十寶章을 발표했습니다. 조선인십보장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해서 자유독립을 위해 투쟁할 것을 선언한 헌장입니다. 4월에 이상룡의 막하幕下에 나아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합니다. 경신庚申(1920년) 8월 15일에 한간韓奸 감영극甘永極에게 피체被逮되어 시신이 토막이 나서 압록강에 던져졌고, 배달의숙과 초고草稿 10여 종과 장서 3천여 권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업적

    환단고서 및 신교철학서 간행

    운초는 1898년 『태백진훈太白眞訓』, 『단군세기檀君世紀』를 간행하고, 1899년 『참전계경參佺戒經』, 『태백일사太白逸史』,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를 간행하였습니다.

    『태백진훈』

    『태백진훈』은 본시 『태백일사』의 부록으로 되어 있던 것을 해학과 운초 두 사람이 따로 빼내어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함께 홍익사서弘益四書라고 불렀습니다. 『태백진훈』은 이암 선생이 쓴 책으로 상·중·하 3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편은 삼일철학三一哲學의 근본이념과 일一을 추구하는 방법론 그리고 왕王, 국國, 민民, 교敎 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중편에서는 환환상제桓桓上帝, 환웅桓雄, 고시高矢, 신지神誌, 웅후熊后, 치우蚩尤, 단군왕검, 단군부루, 고두막高豆莫, 고주몽高朱蒙, 광개토열제廣開土烈帝,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 인물의 공덕을 서술하고, 하편은 사제문답편師弟問答篇으로 우리 민족의 신교철학, 도학심법道學心法과 치국治國, 학문 등에 대해서 제자가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기술했습니다. 운초는 이 책을 간행하면서 발문跋文을 썼는데 이곳에서 『태백진훈』이 배달겨레의 근본 가르침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중요 서적이 된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부경요해天符經要解』

    운초는 처음으로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전문을 『태백일사太白逸史』 속에서 뽑아내어 비로소 세상에 유포를 합니다. 『환단고기』 범례에서 운초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두 글의 전문이 모두 『태백일사』 속에 실려 있으니 이는 실로 낭가郞家의 『대학』 『중용』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대단히 중시하였는데 그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속의 삼일심법三一心法을 우리 민족의 핵심 사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899년 『참전계경』도 간행을 해요. 한민족의 조화경造化經인 『천부경』, 교화경敎化經인 『삼일신고』, 치화경治化經인 『참전계경』의 삼화경三化經이 모두 비로소 운초에 의해 새롭게 독립되어 세상에 전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운초 선생은 위대한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신교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천부경』을 9장으로 나누어요. 주를 달고 1899년에 발문을 쓰게 됩니다. 그는 『천부경』에 주注를 달면서 범세동이 지은 『천리경穿理鏡』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로 보아 『천리경』이 역사 서적이 아니라 신교철학과 이치를 밝힌 서적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범세동이 천부경에 대한 주해註解를 했다고 하였는데 이 『천리경』이 「천부경」의 주해와 관련된 서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발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부경은 大一[太一]의 도를 밝혔다는 것이다. 그는 『천부경요해』에서 천부경을 9장으로 나누고 제1장은 大一之始, 제2장은 大一之本, 제3장은 大一之理, 제4장은 大一之機, 제5장은 大一之象, 제6장은 大一之本, 7장은 大一之數, 제8장은 大一之用, 제9장은 大一之中이라고 모두 大一로 요약하였다.

    둘째, 이 一이 三으로 작용하는 一體三用, 三神一體, 三眞一像, 三韓一國의 예를 들고 있다.

    셋째, 모든 數가 0에서 1이 나와 3으로 작용하고 10까지 발전하는 수리를 설명하고 있다.

    넷째, 환웅천황께서 천부경을 지으신 목적이 性通功完하여 永得快樂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섯째, 서세동점하여 가치관이 무너지는 때를 당해 나를 찾아 자립[求我自立]하고 나를 알아 독립[知我能獨]하며 안으로 수행을 하고, 밖의 침략을 물리쳐서[內修外攘] 새로워져서 權道에 통해야만 多勿興邦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끝으로 『태백일사』에서 뽑아내 단행본을 만들어 주석을 달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첫째, 「천부경」은 대일大一, 이 대일을 태일太一이라고도 하는데요, 태일의 도를 밝혔다는 겁니다. 9장으로 나눴다고 했는데요. 제1장은 대일의 시작(대일지시大一之始), 제2장은 대일의 근본(대일지본大一之本), 제3장은 대일의 이치(대일지리大一之理), 제4장은 대일의 기틀(대일지기大一之機), 제5장은 대일의 모습(대일지상大一之象), 제6장은 대일의 본체(대일지본大一之本), 7장은 대일의 수(대일지수大一之數), 제8장은 대일의 작용(대일지용大一之用), 제9장은 대일의 중심(대일지중大一之中)을 해석한 것이라 하여 모두 대일大一로 요약하였습니다. 대일大一은 정자程子가 말한 만수지일본萬殊之一本과 같은 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천지만물과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근원이고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 생각됩니다.

    둘째, 1이 3으로 작용하는 일체삼용은 우리 신교철학의 핵심 정수입니다. 하나의 본체가 셋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이것이 삼신일체의 원리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성명정이 합쳐져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삼진일상이라 합니다. 또 삼한일국은 단군조선이 진한, 마한, 번한으로 나뉘어져 다스렸지만 본래 하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수가 0에서 1이 나와 즉, 무극에서 태극이 나와 3으로 작용하고 10까지 발전하는 수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넷째, 환웅천황께서 「천부경」을 지으신 목적이 성통공완性通功完하여 영득쾌락永得快樂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서세동점하여 가치관이 무너지는 때를 당해 나를 찾아 자립[求我自立]하고 나를 알아 독립[知我能獨]하며 안으로 수행하고 밖의 침략을 물리쳐[內修外攘], 내가 새로워져서 권도權道에 통해야만 다물흥방多勿興邦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권도는 능소능대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리입니다. 다물은 본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잃어버린 정신을 회복하는 것도 다물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부경」을 『태백일사』에서 뽑아내 단행본으로 만들어 주석을 달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단학회 활동

    단학회는 이기로부터 시작됩니다. 1905년 일본에 갔다가 귀국한 이기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사회문화의 계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07년 을사오적신의 암살실패로 진도에 귀양을 갔다가 방환放還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후 그는 행촌 이암이 쓴 『태백진훈太白眞訓』,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유사太白遺史』, 『규원사화揆園史話』 등 신교경전과 환단고사桓檀古史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해학 이기 선생은 홍암 나철과 처음에는 뜻을 같이 했어요. 평소에 홍암弘岩 나인영羅寅永 선생과 서로 심각하고도 광범한 토론의 기회를 많이 갖기도 했으나 결국 삼신설三神說의 정의와 신시개천神市開天과 단군건원檀君建元등 핵심문제에서 큰 차이점을 보이게 됩니다. 1909년 1월 15일 홍암 나철은 단군교를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해학 이기 선생은 단학회를 창립합니다. 단군교는 1910년에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대종교와 단학회는 길을 달리하게 됩니다. 1909년 3월 16일에 해학 이기 선생은 단학회의 3강령을 제정합니다.


    일, 제천보본祭天報本 삼신님께 제사하여 근본을 갚는다. 이, 경조흥방敬祖興邦 조상을 공경하여 나라를 일으킨다. 삼, 홍도익중弘道益衆 대도를 홍포하여 무리를 유익하게 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단학강령檀學綱領을 채택하고 각 갈래로 흩어진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기 위한 새로운 연구단체인 ‘단학회檀學會’를 만들기로 합의했으니, 때는 융희隆熙 3년(1909년) 3월 16일이며 참성단塹城檀에 고유하기는 그해 5월 5일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해학海鶴 대종사는 발기총회를 보시기 전에 국치민욕에 대한 비분강개를 이기지 못하여 그해 7월 13일 서울 여사旅舍에서 절식자진絶食自盡하게 됩니다.

    해학 이기가 세상을 떠난 후 운초는 단학회 2대 회장이 되는 거죠. 경술庚戌(1910년) 이후 특히 서북지방을 근거로 비밀리에 단학회의 확대발전을 위해 노력합니다. 운초는 1914년 3월 16일 대영절에, 평안북도 천마산天摩山 성인당聖人堂에 모여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上帝를 주벽으로 모시고 환국시조 환인천제桓仁天帝, 신시시조 환웅천황桓雄天皇, 조선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배향配享하여 천제를 올리면서 단학회의 운영과 미래의 발전 방향을 토의하였으며, 취지문趣旨文을 지어 서명을 받았습니다. 이때 천마산天摩山 확대회의에 참석한 중요 인물은 운초 계연수,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 석천石泉 최시흥崔時興, 송암松岩 오동진吳東振, 백하白下 김효운金孝雲, 벽산碧山 이덕수李德秀, 일봉一峰 박응백朴應白, 창춘昌春 양승우梁承雨, 직송헌直松軒 이용담李龍潭, 국은菊隱 이태집李泰楫, 녹수綠水 서청산徐靑山, 백주白舟 백형규白亨奎 등 1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7월에 백암白岩 홍범도洪範圖 장군과 석주 이상룡 선생은 벽산碧山의 소개로 참가하게 됩니다. 이분들 중 대부분이 1962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포상을 받았는데 운초 선생과 국은 이태집 선생은 빠집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은 이를 주도한 분인데 국가로부터 아무런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해 10월 개천절開天節에 박응룡朴應龍, 정창화鄭昌和, 박용염朴龍琰, 김병주金炳周, 이용준李龍俊, 이봉우李奉堣, 허기호許基浩, 신찬정申讚禎, 이양보李陽甫, 주상옥朱尙玉, 이동규李東奎, 김석규金錫奎, 손영린孫榮麟, 이진무李振武 등 14명이 추가로 취지문에 서명하게 되어 회원이 5만 여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이해 겨울에 단학회를 요령성 관전현 홍석랍자紅石拉子로 옮겼는데 오동진 장군이 단학회관檀學會館을 짓고 전토田土를 사서 기증하였다고 하며 여기에서 운초가 배달의숙倍達義塾을 열어 독립군을 양성하고 역사교육을 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16일 운초는 <단학회보檀學會報 창간호>를 간행하였고, <8호>까지 간행을 합니다. 회보 간행의 비용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總裁인 이상룡 선생이 보조했다고 합니다. 1920년 8월 15일 운초가 피살되자 석천 최시흥이 제3대 단학회장을 맡고, 4대 벽산 이덕수, 5대 직송헌 이용담으로 계승이 됐습니다. 단학회에서는 3종5정三宗五正으로 받드는 분이 있는데 3종은 해학 이기 대종사, 석주 이상룡 대종사, 단재 신채호 대종사이고, 5정은 운초 계연수 대승정, 백암 홍범도, 송암 오동진, 석천 최시흥, 벽산 이덕수입니다.

    환단고기 간행

    운초의 집안에서는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삼성기三聖紀』가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운초가 환단桓檀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후 운초는 당시 장서가藏書家로 소문이 난 백진사白進士 관묵寬黙(1804~1866)의 집을 방문하여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얻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운초가 백관묵에게서 직접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전해 받은 것처럼 이해하고 있으나 백관묵이 졸했을 때 운초는 겨우 3살이었습니다. 백관묵은 184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 은거하면서 오로지 죽을 때까지 경전만을 연구하였으며 6권의 문집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의 집안에는 본래 책을 많이 소장하였다고 하니 아마 운초가 소문을 듣고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을 방문하여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얻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운초는 삭주朔州 배골 이형식李亨栻의 집에서 범장范樟이 지은 『북부여기』와 『천리경』을 얻습니다. 이것도 사람들이 이형식에게서 직접 얻은 것으로 생각하나 고성 이씨 족보를 보면 이형식은 1796년에 태어나 1867년에 졸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면 그가 졸했을 때 운초는 4살 이었으므로 역시 그의 사후에 그 집을 방문하여 얻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도 스승인 이기가 소장하고 있던 책인데, 전해 받습니다.

    운초는 1898년 『단군세기』를 간행하고 1899년 『태백일사』를 간행한 것을 이어서 안함로의 『삼성기』, 원동중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범장의 『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 다섯 권을 묶어 해학 이기의 감수를 거친 다음 1911년 5월 5일 묘향산 단굴암檀窟庵에서 『환단고기』의 서문을 쓰고 만주의 관전현성寬甸縣城 안에서 드디어 『환단고기』를 간행하였습니다.

    『환단고기』는 이때 활자본이 아니라 나무에 붓글씨로 쓰고 새김칼로 새겨서 찍어낸 목판본이었고, 30부를 간행했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1부를 가지고 이유립 선생이 남하를 해서 『환단고기』가 퍼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출판비용을 대준 인물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백암白岩 홍범도 장군과 송암松庵 오동진 장군입니다. 운초는 『환단고기』를 간행하면서 다음과 같은 자축自祝의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一爲自我人間之發見主性而大賀也며 一爲民族文化之表出理念而大賀也며 一爲世界人類之對合共存而大賀也라.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요, 또한 민족 문화의 이념을 표출하게 되었으니 크게 경축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만한 일이다.

    이런 멋진 글을 쓰게 되는데요, 위의 내용은 3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먼저 인간이고 다음이 민족이고 마지막이 세계입니다. 『환단고기』 출판의 역사적인 의의로서 그 첫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자신의 주체성, 본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내가 크게 축하한다, 둘째는 민족문화의 표출이념, 우리의 건국이념이라면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 이러한 우리 민족문화의 이념이 『환단고기』를 통해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크게 축하하는 바이다. 셋째는 세계 인류가 대립을 지양해서 하나로 합치고 공존, 공영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축하한다는 내용인데 우리가 앞으로 깊이 실천해야 할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징실徵實함

    운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징실했어요. ‘징실’은 사실을 증명했다는 겁니다. 운초는 무술戊戌(1898년) 5월에 집안輯安에 있는 광개토태왕비를 답사하여 탁본을 떴는데 이것을 무술등본戊戌謄本이라 부릅니다. 이 때 총 1,802 글자 중에서 알 수 없는 글자가 117자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그 후 14년이 지난 1912년 5월 다시 가서 탁본을 떴는데 많은 글자가 마멸되어 알 수 없는 글자가 더욱 많았다고 합니다. 일제가 광개토대왕비문의 글자를 마멸한 것이 1898년에서 1912년 사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에 운초는 무술등본을 바탕으로 138자를 복원하고, 이를 징실徵實이라 했습니다.

    이 때 징실徵實한 글자 138字는 다음과 같습니다. 징실자徵實字는 ‘・’으로 위에 표시했습니다. ( )에 있는 것은 징실한 글자 수이고, 번역은 필자가 추가하였습니다.



    一, 소제구치掃除仇耻 (2) 원수와 부끄러움을 쓸어 제거하다(태왕의 등극과 승하).

    점 찍은 글자를 복원한 것입니다. 구치가 마멸된 글자인데, 광개토대왕께서 등극한 뒤에 원수와 부끄러움을 쓸어서 제거했다는 것입니다.

    二, 이과려以䂺麗 누범변경屢犯邊境 (4) 과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영락 5년, 395년)

    三, 백잔百殘이 연침신라聯侵新羅 (4)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범했다.(영락 6년)

    四, 우분견又分遣 급위기국성急圍其國城 (5) 또 군사를 나누어 보내 급히 그 도성을 포위하였다.(영락 6년)

    五, 횡절직돌橫截直突 약사국성掠使國城 (4) 가로질러 끊고 곧장 돌격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도성을 공략하게 했다.(영락 6년)

    六, 관병官兵 섭적이월躡跡而越 협공래배夾攻來背 급추지임나가라急追至任那加羅 (8) 관병(고구려군)이 (도망간) 자취를 밟아 바다를 건너가 협공을 하면서 등 뒤로부터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에 이르렀다. (영락 10년)

    광개토대왕이 대마도에 상륙했다는 뜻입니다. 서기 400년 경자년에 광개토대왕이 일본열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七, 왜만왜궤倭滿倭潰 성城 육피아공六被我攻 탕멸무유盪滅無遺 왜수거국倭遂擧國 항降 사자십지팔구死者十之八九 진신솔래盡臣率來 (20) 왜적이 성에 가득했으나 왜적이 무너지니 성이 여섯 번이나 우리의 공격을 받고 탕멸하여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죽은 자가 10명 중 8, 9명이고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여 왔다.(영락 10년)

    그러니 이런 글자를 일본이 그대로 둘 리가 없거든요.

    八, 만가滿假□□ 왜욕감전倭欲敢戰 여탁기탄與啄己呑 탁순제적卓淳諸賊 모謀□□관병官兵 제선직취制先直取 탁순卓淳 이좌군而左軍 유담로도由淡路島 도단到但 마馬 우군右軍 경난파經難波 지무장至武藏 왕직도축사王直到竺斯 제적실자궤諸賊悉自潰 수분위군遂分爲郡 안라인安羅人 수병戍兵 (55) 왜적이 감히 싸우려고 하여 탁기탄啄己呑, 탁순卓淳(지금의 하카다 박다博多)의 여러 적들과 함께 □□을 도모하다가 관병이 기선을 제압하여 곧장 탁순을 취하고 좌군은 담로도淡路島(일본 오사카 앞에 있는 섬)를 거쳐 단마但馬(효고현兵庫縣의 북부, 현재의 풍강시豊岡市, 양부시養父市, 조래시朝來市, 향미정香美町, 신온천정新溫泉町 구역)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難波(지금의 오사카大阪)를 지나 무장武藏(근기近畿 동쪽, 지금의 동경도東京都, 기옥현埼玉縣, 신내천현神奈川縣의 일부)에 이르고 왕께서는 곧장 축사筑斯(축자築紫, 북구주)에 이르시니 모든 적들이 다 스스로 무너졌다. 드디어 나누어 군郡을 만들고 안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영락 10년)

    빈 칸은 탁본으로도 복원을 하지 못한 글자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일본열도에 상륙해서 일본을 초토화시킨 내용이 전부 지워져 있습니다. 이것을 운초 선생이 복원을 한 것입니다.

    九, 왜불궤□倭不軌, 침입대방계侵入帶方界 분략변민焚掠邊民 자석성도自石城島 연선連船 폐해대지蔽海大至 왕王 문지노聞之怒 발평양군發平穰軍 직용전直欲戰 상우相遇 (19)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하여 불지르고 변방의 백성들을 노략질을 하며 석성도(요동반도 동남쪽 작은 섬)로부터 배를 잇대어 바다를 덮고 크게 이르니 태왕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시어 평양의 군사를 출동시켜 곧장 만나 싸우려고 했다.(영락 14년)

    十, 정비丁未 교견보기오만敎遣步騎五萬 왕토거란성往討契丹城 이태뢰천사제以太牢薦師祭□합전合戰 (11) 정미(407년)에 전교를 내리시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가서 거란성을 치게할 때 태뢰(소, 양, 돼지를 잡아 제사 지내는 것)로 군제를 올리고 전쟁을 하였다.(영락 17년)

    十一, 파사구성破沙溝城 누성婁城 위군현爲郡縣 항범降凢□ 우습취양주성又襲取凉州城 (5) 파사구성, 누성을 격파하여 군현郡縣으로 삼고 범□를 항복받고 또 양주성을 습격하여 취하였다.(영락 17년)

    十二, 구모로성사가臼模盧城四家 (1) 구모로성 4가 (수묘인호구)

    이렇게 138자를 복원했는데 왜와 관련된 글자가 106자입니다. 일본인들이 태왕비를 크게 훼손시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31년 삼육사의 회람잡지에 ‘성능비결자징실’을 게재했다가 압수당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편집장 전봉천은 도주하고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자로 해산됐고 관련자들이 모두 구속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위의 내용 중에서 일본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조문을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3조의 백잔百殘 연침聯侵 신라新羅의 앞뒤의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잔百殘 신라新羅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 이왜而倭 이신묘년以辛卯年 래도해파來渡海破 백잔百殘 □□신라新羅 이위신민以爲臣民


    일인日人 학자들은 이것을 “고대 왜倭가 신묘년 즉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百殘을 격파하고 □□신라를 신하의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합니다. 필자는 이 조문에서 도해파渡海破의 해海를 매每로 보고자 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도渡와 달리 해海의 ‘삼수변’은 세로줄 밖으로 나가있어 ‘삼수변’을 버리면 매每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경철화耿鐵華가 처음 주장하였고 이도학도 이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유승국 교수도 해자海字의 좌左측 수‘氵’이 비문碑文의 종선縱線 안에 있지 않고 선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하여 ‘每’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침聯侵을 보결補缺하고 앞의 문장부터 토를 붙이고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잔百殘 聯侵신라新羅는 구시속민舊是屬民이니 유래조공由來朝貢이오 이왜而倭가 이신묘년以辛卯年에 래도來渡하니 매파每破하시고

    백잔百殘이 신라新羅어늘 이위신민以爲臣民이라 백잔(백제)과 신라는 옛날부터 우리의 속민이니 이전부터 조공을 바쳤고 왜倭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오니 매번 격파하였고 백잔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범함으로 (신라가) 우리의 신하 백성이라고 여기시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앞부분에서 “백잔과 신라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라는 내용과,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으로 여겼다.”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6조의 고구려 군이 도망가는 왜군倭軍의 자취를 밟아 바다를 건너 임나가라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임나가라가 한반도의 남해안이 아니라 대마도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7조의 내용 바로 앞의 문장이 “발시라성拔始羅城 도성都城”입니다. 시라성은 구주九州 대우국大隅國의 시라성始羅城으로 지금의 녹아도현鹿兒島縣의 압량군姶良郡이 옛 시라군始羅郡이고, 도성都城은 궁기현宮崎縣의 남쪽에 있는 성입니다. 따라서 7조의 내용은 고구려 군이 구주九州의 남쪽을 초토화시킨 내용이 됩니다.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8조의 내용은 고구려군이 담로도淡路島를 거쳐 지금의 병고현兵庫縣을 치고 대판大阪과 동경東京까지를 공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운초가 무술등본을 바탕으로 138자를 징실보결徵實補缺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계연수 선생은 『환단고기』를 간행하여 한민족의 9천 년 역사와 국통을 밝힌 위대한 역사가이며, 한민족의 신교 철학서인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독립시켜 간행하여 한민족의 도학심법道學心法을 후세에 전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신교철학자입니다. 단학회의 2대 회장을 맡아 민족의 역사와 고유 정신의 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치고 순국한 불굴의 독립운동가입니다. 광개토태왕 비문의 138자를 징실徵實 복원하여 광개토열제 훈적勳績의 진면목과 웅혼한 고구려의 기상을 후세에 전한 진정한 대한인大韓人이었습니다. 겨레의 큰 스승인 운초 계연수의 위대한 생애와 불후不朽의 공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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