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고구려의 천하관
고구려의 천하관과 중국의 천하관
고구려는 예부터 천자 사상을 받들어 주변국을 복속하여 독자적인 천하를 형성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천상을 다스리는 존재를 천제로,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를 천자로 정의하고, 천자가 다스리는 천하는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그 주변국들로 구성된다고 여겼다.
고구려의 천하관은 중국의 천하관과 달랐다. 중국은 춘추 시대에 하늘 아래 온 세상이 중국에 속해 있다고 보면서 중국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와 종족은 전부 오랑캐로 간주하는 천하관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을 화이 사상이라 부른다. 중국은 가운데라는 말인 중화로, 중국 밖의 주변국은 이적(오랑캐)으로 취급한 것이다. 중국은 고구려까지 중국의 천하에 속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의 천하에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했고, 그 내용도 달랐다. 중국은 ‘천하는 하나뿐’이란 논리로 세계 전체가 중국의 천하에 속해 있다고 보았지만, 고구려는 ‘세계에는 여러 개의 천하가 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고구려의 천하는 그 여러 천하들 중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거나 미쳐야 한다고 여기는 범위의 지역이 곧 고구려의 천하라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는 현대인의 안목으로 볼 때 중국보다 상당히 발달한 천하관이었다. 고구려는 이런 세련된 천하관을 바탕으로 중국과는 공존하면서 자신의 세계인 동북아시아에서는 패권을 유지했다. 고구려는 중국에 대해 대등 의식을 가졌으므로, 고구려의 왕과 중국의 황제가 대등하다고 여겼고, 중국에 고구려 중심의 천하 사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물론 고구려도 중국과 같이 화이 사상을 가지고 자국과 주변국을 구분했다. 백제를 ‘백잔’으로, 신라를 ‘동이’로 비칭한 것과, ‘왕’ 칭호는 고구려왕이 독점하고 백제왕을 ‘주’로, 신라왕을 ‘매금’으로 비칭한 것은 고구려를 중화로, 주변국을 이적으로 구분했음을 말해 준다. 하지만 이것은 중국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다른 고구려의 천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천하를 완성한 추모왕, 천하를 재건한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비에 따르면, 고구려의 천하는 시조 추모왕 때 이미 완성되었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해 왔다.’, ‘동부여는 추모왕의 속민이었다.’는 비문 기록은, 고구려 제국을 중심으로 한 천하가 광개토태왕 때가 아니라 시조 추모왕 때 이미 완성되었음을 말해 준다. 속민이란 같은 혈족을 뜻하는 말로서, 고구려가 세 나라에 대해 동족 의식을 가졌음을 말해 준다. 추모왕 때 천하는 고구려 제국을 중심으로 백제, 신라, 동부여에 한정되었고, 제국이 조공을 받는 것도 백제, 신라, 동부여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고구려의 천하관은 크게 훼손되었다. 중국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북쪽의 동부여가 천하를 이탈해 자립하고, 남쪽에 왜가 출현하면서 백제와 신라도 천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특히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비문 기록처럼, 고구려는 북쪽보다 남쪽에 시선을 집중했다. 고구려의 천하는 추모왕 때 이미 완성되었는데, 왜는 훨씬 뒤인 신묘년에야 출현했다. 이미 완성된 천하에 새로이 왜가 나타난 것은 제국의 천하 질서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왜가 천하를 침범함으로써 백제와 신라가 이탈하고 말았다. 천하를 주재하는 고구려로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천하를 이탈한 속민을 구원하지 못하면, 주변국과 상생하며 산다는 제국의 논리가 우스워지기 때문이다.
추모왕의 자손 광개토태왕은 이런 시대상이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는 구세주였다. 광개토태왕은 크게 흐트러진 천하관을 다시 정립하고, 추모왕 때의 천하를 되찾기 위해 침범자 왜를 밖으로 물리치고 백제, 신라, 동부여를 통일했다. 그가 전개한 통일 전쟁에는 세 나라가 고구려 제국의 속민이라는 명분이 개입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영토도 크게 확장하여 사후에 ‘광개토’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통일 전쟁은 추모왕 시절의 천하를 원상 복구시키는 것이 큰 목적이고, 영토 확장은 다만 그에 포함된 작은 목적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천하 통일과 영토 확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것이다. 치밀한 논리와 계획에 따라 통일 전쟁을 수행했고, 그의 대업은 당연 성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광개토태왕은 그밖의 가야나 숙신 같은 나라는 복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 제국의 천하에 들어올 수 없어서였다. 앞서 밝혔듯, 광개토태왕은 추모왕 때의 천하를 원상 그대로 복구하고 유지하려 했다. 그 원상이란 백제, 신라, 동부여만이 속한 천하의 모습으로, 이런 논리에 따라 가야나 숙신은 천하에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가야는 고구려군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할 때 성 하나를 내준 일이 있지만, 고구려는 그 성조차 직접 관리하지 않고 신라에 넘겨주었다. 고구려는 가야를 신라에 포함된 주변국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또,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만의 화이 사상을 가지고 주변국을 대했다. 백제, 신라, 동부여, 왜를 똑같이 이적으로 구분했지만, 나머지 세 나라와 달리 왜는 제국에 포섭되는 대상이 아닌 축출의 대상이었다. 왜는 처음부터 천하의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제, 신라, 동부여는 원래부터 천하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이적으로 구분되면서도 제국의 은혜를 받아 포섭되었다. 하지만 왜는 이적으로는 구분되어도 포섭되지는 않았다. 이런 논리에 따라 고구려는 왜의 출현에 민감히 반응하며, 조공을 받는 일도 없이, 왜를 천하 밖으로 쫓아낼 뿐이었다. 왜는 제국의 천하 밖에 존재하는 세력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속민에 대해서도 일정한 논리를 적용했다. 속민 중에도 질서에 충실한 속민은 군사적으로 안전을 수호하고, 질서를 어긴 속민은 군사적으로 응징하여 다시 포섭한다는 것이다. 신라는 전자에 해당하고, 백제는 후자에 해당했다. 신라는 제국의 천하 질서에 충실하였으므로, 왜의 침입을 받았을 때에도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반면 제국의 천하관을 인정하지 않았던 백제는 질서를 어기고 바깥 세력인 왜와 내통하기도 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왜를 내쫓아 천하를 수호하고, 백제를 응징해 다시 포섭했다. 이는 단순히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반적인 보복전이 아니라, 천하의 질서를 굳게 다진다는 대의명분의 표현이었다. 고구려는 이처럼 철저하고 치밀한 질서 논리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천하관에 따라 동북아시아 지역의 주변국과의 관계를 조공으로 규정하고,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왕은 이런 국제 질서를 담당하는 주체로 자임했다. 곧 현실적인 힘이 미치는 한 천하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당당한 천하관의 표현이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에 나타난 제국 고구려의 천하관이다.
광개토태왕비, 고구려인이 되어 읽는다
주제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이런 논리의 이해가 선행될 때 비로소 광개토태왕비의 바른 이해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비문은 고구려인이 자신의 역사관을 담아 쓴 하나의 ‘텍스트’다. 비문에 관한 모든 논란은, 비문을 온전히 고구려인의 ‘논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사실’을 규명하는 데만 집착한 결과 발생한 문제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주변국을 고구려인들이 어떻게 ‘인식’했는지는 전혀 확인하지 않고 주변국의 역사적인 ‘위치’만을 확인하려 했기 때문에, 어떻게 비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같은 당황스런 기사도 실리게 되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