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辛相龜

 

   이상설(李相卨)은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부재(溥齋), 본명은 순오(舜五)이다.

   어려서부터 재동,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에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무렵에는 박의암이라는 한학자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다. 총명한 두뇌와 탁월한 이해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단한 학구열로 17세 때는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구열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타고난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로 선생은 20살이 넘으면서 이미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만한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그리고 신학문을 접하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수학 등을 공부하였고 독학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를 정도로 명석했다고 전해진다.
   고종 31년인 1894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여 화직(華職)이라 할 수 있는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이어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과 비서원랑(秘書院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96년 1월에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고, 6월에는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관직을 사임하였다. 이처럼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유가 있는 시간에는 늘 학문을 닦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인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헐버트(H. B. Hulbert)와 교분을 갖게 되었다. 헐버트는 그 후 선생과 헤이그 사행을 같이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898년 가을에는 이회영, 여준, 이강연 등 당시의 친우들과 회동하여 시국을 광구(匡救)하고자 자신의 서재를 연구실 겸 회의장으로 정하고 매일 회합하였다. 선생은 신학문을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공부하였지만, 특히 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지칭되었다.
    1904년 34세 때에 보안회(保安會)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35세 때에 법부협판(法部協辦) ·의정부참찬(參贊)을 지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 등과 협의,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돌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때 이상설이 자결을 시도하는 장면을 목격한 김구가『백범일지』에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이회영, 이동녕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이주,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당시 룽징춘[龍井村]은 항일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독립운동기지로 역할하였다. 이상설은 용정을 중심으로 최초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하였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 때 이준은 자결을 단행,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진행되고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영국 ·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이동녕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3월 21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향년 4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선생의 유언을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날렸다. 이때 그의 문고(文藁)와 유품도 거두어 불살랐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1. 윤병석,『이상설전』, 일조각, 1998.
   2. “이상설(李相卨)”, 네이버 두산백과, 2016.3.23.
   3. “이상설(李相卨)”, 네이버캐스트, 2016.3.23.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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