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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왜곡]

    중화사관과 식민사관에 물든 한국사 교과서(3)

    [잘못잡은 단군조선 삼조선 체계와 잃어버린 북부여사]
    대한의 상고사의 국통맥에서 잘못 잡은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고구려의 뿌리인 북부여北扶餘에 관해서 집중 조명하려 한다.
    최재목 대한사랑 기자

    우리 역사 맥脈을 검토할 때 유념할 것이 있다. 무엇보다 교과서의 집필자가 어떤 사료를 뼈대로 삼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이 만일 건물을 매입한다면 기초 설계가 잘못되었거나, 뼈대가 부실한 건물을 매입하겠는가? 같은 이치로 한 나라의 역사 교과서도 제일 먼저 국통맥부터 검토해야 한다.

    그럼 현 대한민국 교과서가 취한 국통맥의 기본 사료는 무엇인가? 그것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설한 ‘우리역사넷’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기본 사료를 보면, 대한인의 교과서에 대한인의 기록보다는 중국 측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앞서 살펴본 3천 년 이내의 양대 재액으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서들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도 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이웃의 역사 기록을 무조건 수용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단군조선과 북부여, 고구려와 대적한 세력이 남긴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100% 정확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의도적인 왜곡·날조가 있을 경우 모든 게 뒤틀리게 된다. 사람으로 치면 척추와 목뼈가 뒤틀린 것과 같은 큰 낭패를 보는 것과 같다.

    실제로 현 교과서는 단군조선과 열국시대를 전하면서 『사기』(한나라 사마천, BCE 108~BCE 91에 저술)와 『삼국지』(진晉나라의 진수, 290년 경 저술) 등을 핵심 사료로 삼는다. 그러나 두 기록도 이미 단군조선 초기로부터 2천 년 이상 흐른 후의 기록이며, 더구나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춘추필법’으로 기록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 대한 교과서의 기본 뼈대는 춘추사관으로 기록된 지나족의 기록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부터 이미 왜곡된 중화사관으로 집필된 사료로 구성하다 보니 대한의 역사교과서는 그들이 정한 역사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는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날조하여 대한상고사를 유린했다.

    이번 호에서는 대한 상고사의 국통맥에서 잘못 잡은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뿌리인 북부여에 관해서 집중 조명하려 한다. 현 교과서에 나오는 단군조선에 관한 몇 가지 엉성한 기록들을 검토해 보자.

    엉망으로 붙여놓은 단군조선

    현 교과서에서 인정하는 단군의 숫자는?

    현 교과서는 단군조선을 전개하면서 다섯 명의 통치자를 전한다. 창업자이신 단군왕검과 부(비)왕, 준왕 그리고 위만과 그 손자 우거왕이다. 이는 한국사료인 『삼국유사』와 중국 사료인 『사기』, 『삼국지』를 뼈대로 한다.

    『삼국유사』

    단군왕검 관련 기록 / 서기전 2333년

    단군왕검이 있었다.

    위서魏書에 운云 내왕이천재乃往二千載에 유단군왕검有壇君王儉이 입도아사달立都阿斯達하시고 개국호開國號 조선朝鮮하시니 여고동시與高同時니라 『위서』에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께서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고 나라를 세워 이름을 조선이라 하시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였다.

    『삼국지』

    비(부)왕 준왕 관련 기록 / (BCE 3세기) 서기전 214년 경

    『삼국지』 기록1: 『위략』을 인용해 조선왕 부否의 존재를 전함.

    위략魏略 급진병천하及秦并天下 사몽념축장성使蒙恬築長城 도요동到遼東 위략에 말하길, 진이 천하를 통일하자,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시조선왕부립時朝鮮王否立 외진습지畏秦襲之 약복속진略服屬秦 불긍조회不肯朝會 이 때에 조선왕 부가 즉위하였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상 진에 복속하였으나 진에 조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한배송지주韓裴松之註)

    『삼국지』 기록2: 부왕을 계승한 아들 준왕

    위략魏略 부사否死 기자준입其子準立 위략에 말하길, 부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즉위 하였다.

    이십여년이진항기二十餘年而陳項起 천하란天下亂 그 뒤 20여 년이 지나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제조민수고燕齊趙民愁苦 초초망왕준稍稍亡往準 준내치지어서방準乃置之於西方 연·제·조나라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점차 준에게 망명하여 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에 안치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한배송지주)

    『사기』 『조선열전』

    위만과 우거왕 관련 기록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조선왕만자朝鮮王滿者 고연인야故燕人也 조선왕 위만은 옛 연나라 사람이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

    위만이 (준왕을 내쫓고) 왕검성에 도읍하다.

    연왕노관반燕王盧綰反 입흉노入匈奴 만망명滿亡命 취당천여인聚黨千餘人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은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았다.

    퇴결만이복이동주출새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도패수渡浿水 거진고공지상하장居秦故空地上下鄣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장으로 동으로 달아나 변경을 넘고 패수를 건너 진나라 옛 빈 지역 상하장에 거처하다가

    초역속진번조선만이稍役屬眞番朝鮮蠻夷 급고연제及故燕齊 망명자왕지亡命者王之 도왕험都王險 조금씩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옛 연나라와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들을 예속시켜 부렸으며 왕검을 도읍으로 삼았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손자 우거에게 왕위를 전하다.

    전자지손우거傳子至孫右渠 소유한망인자다所誘漢亡人滋多 우미상입현又未嘗入見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에 이르러 유인을 받은 한나라 망명자가 많이 불어났는데도 들어와 (천자를) 배알하지 않았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진나라 진수(233~297)가 집필한 『삼국지』는 위나라 역사서인 『위략』(위나라 어환 편찬, 280년경 기록)을 인용해 비否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몽염 장군을 시켜 장성을 요동까지 쌓게 할 때 조선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삼국지』는 『위략』을 인용해 서기전 214년 ‘조선왕비립朝鮮王否立’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삼국지』의 기록으로는 비왕이 단군조선의 정식 계승자인지, 아니면 변방의 지도자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단지 지나족은 춘추필법을 통해 조선의 왕이라 칭했을 뿐이다. 지나족이 조선현, 조선왕이라 칭함은 그들과 인접한 지역의 조선과 통치자임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그 이전 역사와 맥락이 단절된 기록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현 교과서는 강력한 비왕과 준왕이라 높이며, 위만을 단군조선 정식 계승자로 보고 있다.

    비왕 준왕 칭송

    고조선은 국가 체계를 정비하고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이에 중국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과 대적할 만큼 성장하였다. 한편,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과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했으며,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미래앤 16쪽)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부왕과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다. 통치 체제도 정비하여 상, 대부, 장군 등 관직을 두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출판 18쪽)

    위만 칭송

    기원전 2세기에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오자, 준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서쪽 변경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이주민 세력을 통솔하면서 세력을 키운 위만은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위만 조선은 발달한 철기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해 갔다. 또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영토를 넓혔고, 중국의 한漢과 남방의 진辰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고등학교 한국사, 미래앤 17쪽)

    위만은 준왕이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기자 유민을 통솔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 후 위만은 중국과 갈등을 이용하여 기원전 194년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중략)

    위만이 집권한 뒤 고조선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다. 철기 사용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고 강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주변으로 세력을 뻗쳤다. 또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주변 나라가 중국의 한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막고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출판 19쪽)

    현 교과서의 삼조선 체제는 정당한가?

    현 교과서는 단군왕검의 고조선과 비왕·준왕의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우거왕의 위만조선이라는 삼조선 체제로 기술했다. 이것이 단군조선 전체이며, 대한통사의 하나뿐인 통설, 정통 맥으로 인식시켜 왔다. 과연 이런 평가는 정당한가? 두 가지를 고려하며 평가해 보자.

    첫째, 단군왕검과 비왕 사이의 시간 틈이 얼마나 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2,100년이 넘는다. 『삼국유사』에서 전한 BCE 2333년 단군왕검의 개국을 기술하고 바로 BCE 214년 비왕의 시대로 점프한다. 이것은 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인정하는 『삼국유사』과 『삼국지』 기록만을 연결해 놓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섯 왕은 단군조선 왕조사를 대표할 수 있는가? 단군왕검과 부왕·준왕 사이의 연결성이 없다. 또 위만·우거왕의 역사도 기준왕을 내쫓은 역사라 계승의 의미는 없다. 한마디로 단절의 조선사다. 단지 이름만 조선일 뿐 하나의 역사라 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단군조선의 건국자 단군왕검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통 한민족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혈통적으로 부왕과 준왕은 기자조선 계열이고, 위만왕과 우거왕은 연나라 사람이다. 현 교과서가 채택한 삼조선 체제는 단군조선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부족하다. 2,100년의 역사 단절은 너무 크다. 마치 1천 년 신라와 각 5백 년인 고려, 조선사 없이 부여에서 대한민국으로 점프한 것과 같다. 이를 어찌 정당하다 할 것인가? 이렇듯 지금의 대한민국 교과서 속 단군조선은 몸통이 없는 머리와 꼬리만의 역사다. 그것도 왜곡된 꼬리가 진짜인 양 머리에 붙어 있는 꼴이다. 이는 다른 시공간에서 발견된 세 조각의 파편을 엮어 복원한 도자기와 같다.

    [현 교과서의 단군조선사의 기술 문제]

    너무나 큰 역사 단절과 성급한 일반화 단군왕검→ (2,100년) 비왕·준왕(기자조선) → (서기전 195년 망명) 위만·우거왕(위만조선)

    • 2,100년의 역사 공백을 성급하게 중국 기록만으로 복원했다.

    세 조각의 파편으로 복원된 도자기 『삼국유사』와 『사기』, 『삼국지』 등의 기록 파편으로 복원해 불완전하다.

    머리와 꼬리만 있고 몸통이 없는 생선 머리인 시조 단군왕검과 꼬리인 준왕, 위만의 역사뿐이다. 대한상고사의 핵심인 단군조선은 몸통 없는 생선 신세다. 꼬리마저 제대로 된 한국산이 아닌 중국산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런 잘못된 역사맥을 간파하고 한마디로 정리했다.

    기존 역사서에서는 삼조선이란 용어를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로 잘못 해석했다. (『조선상고사』 121쪽)

    삼조선은 동방 조선의 제천문인 「서효사誓效詞」가 노래한 것처럼 중앙의 진한(진조선), 서쪽의 번한(번조선), 남쪽의 마한(말조선)이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아니라는 일침이다.


    또 윤내현 교수도 고려 중기 숙종 때에 잘못 연결된 대한의 국통맥을 간파하고, 번조선 강역에 있었던 기자와 위만조선, 한사군은 이제 대한의 국통맥에서 빠져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우리 고대사가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 숙종 때부터였던 것 같다. 숙종 때 평양에 기자묘와 사당을 만들고 기자를 국가 제사에 포함시킨다. 유학의 강화에 따른 모화(慕華: 중국을 그리워하다. 존숭하다)사상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 고려 후기에 오면 고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면서 이들을 같은 지역에 있었던 전후관계로 체계화하였고, 이때부터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건국된 위만조선과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설치된 한사군도 함께 우리 역사의 주류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전조선(고조선)과 후조선(기자조선)에 위만조선을 더하여 삼조선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계는 근세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광복 뒤 우리 역사를 체계화하면서 위의 체계에서 기자를 삭제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있으므로 굳이 기자를 우리 역사의 주류에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당시 학자들이 생각한 기자의 망명지 조선은 한반도였다는 점이다. 기자를 우리 역사에서 삭제한다면 기자의 후손인 준왕,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건국된 위만조선, 위만조선이 망하고 그 자리에 설치된 한사군 등은 수직으로 연개되어 있는 사건들이므로 함께 삭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기자만 삭제되고 나머지는 우리 역사의 주류에 그대로 남았다. 그 결과 준왕은 단군왕검의 후손인 것처럼 되고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의 여러 나라는 한사군 지역 안에서 건국된 것으로 서술되었다. 이러한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서기 3세기 무렵까지)은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행 고대사 체계는 잘못된 것임이 사료를 통해 명백히 확인된다. (중략) 지난날에는 특별히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도 많지 않았고, 고대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축적되어 있지 못해, 그런 오류를 범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크게 개선된 환경에서 연구하는 오늘의 학자들이 우리 역사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 18~19쪽)


    지금의 잘못된 역사는 「서효사」가 전한 단군조선의 통치정신인 삼조선 체제를 몰라서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다. 진조선 강역을 무시하고 서쪽 강역 역사인 번조선사를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중국 사서만 믿고 그것을 단군조선의 몸통으로 놓은 것이다. 왼쪽 팔이 몸통이 된 꼴이다. 그것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다. 이제는 잘못된 삼조선 체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단군조선의 계승자인 북부여를 제대로 조명해야 하며, 단군조선의 실제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기자조선 – 위만조선 – 대동강 한사군’의 문제를 대한인의 기록과 지나족의 기록을 면밀하게 분석해 제대로 된 교과서를 만들어 후세 대한인을 양육해야 한다.

    고구려의 뿌리인 북부여가 사라진 국사 교과서

    이제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부여사에 관한 잘못된 교과서 내용을 검토할 시간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대한광복군의 정신으로 현재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무엇이 잘못 기술되었는지 살펴보자.

    부여사: 중학교 교과서, 좋은책신사고

    고조선 다음으로 출현한 부여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여러 나라가 성장하였다. 그중 부여는 고조선 다음으로 등장하였다. 쑹화 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아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였으며, 중국과 일찍부터 교류하였다. 부여는 5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이었다. 왕 밑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왕은 중앙을 직접 다스렸으며, 여러 가加들은 자신들의 영역이 사출도를 다스렸다. (중략) 12월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한편, 부여의 법은 고조선 8조의 법과 비슷한 4개의 법률 조항이 전해 오고 있다. (37쪽)

    부여사: 고등학교 교과서, 지학사

    1세기에서 3세기 무렵 만주와 한반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있었는데, 정치가 발전한 정도는 서로 달랐다. 한과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고구려와 부여는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왕권이 존재하는 초기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26쪽)

    부여사: 고등학교 교과서, 천재교육

    부여는 쑹화강 상류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였으며, 말, 주옥, 모피 등이 주요 특산물이었다. 서쪽으로는 북방 유목 민족인 선비족과,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대립하였으며, 중국의 한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1세기경에 이르면 왕권이 안정되고, 영역도 사방 2,000여 리에 달하였다. (중략) 3세기 말에는 선비족의 침략으로 한때 수도가 함락되기도 하였으며, 4세기에는 전연의 침략으로 왕이 포로가 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후 국력이 쇠퇴하여 494년 고구려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19쪽)

    현 교과서는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과 지나 기록인 『삼국지』, 『통전』을 근거로 하여 부여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패망을 다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 교과서는, 여러 부여(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가 존재했음에도 서부여를 기록한 지나支那족의 기록을 맹신하여 교과서의 중심에 놓고 부여로 통칭한다. (『삼국지』는 지나족과 인접한 서부여 세력을 전체 부여로 보고 기술하였다.)

    현 교과서 속 부여사 서술의 세 가지 문제점

    첫째,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건국사가 빠졌다. ‘부여는 고조선에 이어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등장한 나라이다.’, ‘고조선 다음으로 출현한 국가다.’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이 빠져 있다. 단군조선과 부여의 실제적인 이야기가 없다.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 건국 이야기도 빠졌다.

    둘째, 부여의 통치제도, 문화와 법률만 전할 뿐 맥이 없다. 사출도四出道라는 통치제도와 영고迎鼓라는 제천문화 그리고 부여 법률 등을 전할 뿐 단군조선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셋째, 하나의 부여로 뭉뚱그려 놓았기에 부여사의 맥과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여러 부여를 하나의 부여처럼 얽어 놓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북부여와 동부여 그리고 서부여의 역사가 하나로 뭉뚱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건국과 패망의 주체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한국통의 핵심인 북부여와 고구려의 연결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여사는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가?

    첫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달라 약술해 버렸다. 한국사를 대표하는 두 사료는 중심인물인 해모수와 동명왕(고두막한), 해부루왕과 주몽의 역사가 상충된다. 두 기록이 다르다 보니 자세히 기술하기 어려워서 부여사를 1~2페이지로 간략하게 기술한 것이다.

    둘째, 고구려 역사정신이 드러나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문에 ‘북부여’를 새겼다. 장수왕은 시조 주몽의 역사를 전하면서 북부여를 고구려의 뿌리라 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대부분의 교과서에선 그 사실을 다루지 않는다. 높이가 6.39미터에 이르는 동북아에서 가장 큰 비석에 새겨진 ‘출자북부여出自北扶餘’ 다섯 자를 무시함으로써 북부여사의 실제 역사가 지워지고 말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북부여와 그 시조인 해모수 단군을 모른다. 단군조선과 북부여 그리고 고구려의 맥을 연결하지 못한다. 대한의 국통맥이 단절된 것도 모르고 한국사를 시험을 위한 암기과목으로 배울 뿐이다.

    북부여와 함께 되살아나는 대한의 국통맥

    이제 단군조선과 북부여 그리고 동부여와 고구려의 맥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자. 우선 가까운 북부여와 고구려의 연결성을 살펴보고, 이어서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연결되는 올바른 국통을 찾아보자. 북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이야기다. 문헌(『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과 광개토태왕비문을 통해 주몽의 역사를 살펴보자. 비문과 한민족사를 대표하는 문헌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은,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 땅에 이르는 길에 ‘나는 천제지자요, 하백의 외손’이라 하니 어별魚鼈(물고기와 자라)이 다리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엄수(송화강)를 건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은 졸본 땅에 이르렀는데, 주몽이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아본 부여왕이 세 딸 가운데 둘째 딸을 주몽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었다.

    백제시조온조왕百濟始祖温祚王 기부추모其父鄒牟 혹운주몽或云朱蒙 자북부여도난自北扶餘逃難 지졸본부여至卒本扶餘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는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무자扶餘王無子 지유삼녀자只有三女子

    현주몽지비상인見朱蒙知非常人 이제이녀처지以弟二女妻之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미기부여왕훙未幾扶餘王薨 주몽사위朱蒙嗣位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승하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 백제국 본기)

    『삼국사기』에서는 이처럼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해 졸본부여에 왔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주몽 일행을 뒤쫓은 병력은 북부여 병사였을까? 동부여 병사였을까? 대소帶素는 동부여의 왕자인데 이 『삼국사기』에는 북부여로 잘못 기록되었다. 대소 왕자의 아버지 금와왕은 북부여가 아니라 동부여의 통치자였다. 이 사실은 『삼국유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선시북부여왕해부루先是北扶餘王解夫婁 기피지우동부여旣避地于東扶餘 급부루훙及夫婁薨 금와사위金蛙嗣位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갔고,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그럼 『삼국유사』에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어떻게 전하는가? 동부여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고, 그 맏아들이 대소였다. 대소는 주몽과 함께 놀았지만 항상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주몽을 없애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어느 날 대소는 “주몽은 사람이 낳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일 일찍 없애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라고 왕에게 고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지만 대소를 비롯한 여러 왕자와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했다. 그때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함께 동부여를 떠났다. 이를 안 동부여군이 쫓아오고 앞에는 엄수淹水라는 강이 있었다. 이때 주몽이 강가에서 “아시천제자我是天帝子 하백손河伯孫”이라고 하고 어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강을 건넜다. 동부여군은 더 쫓아오지 못했다. 주몽 일행은 마침내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을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 『삼국사기』에 있는 위 기록과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주몽이 동부여에서 태어나 졸본 땅을 기반으로 부여왕의 사위가 되어 부여를 계승한 단군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여왕은 동부여나 서부여가 아니라 북부여의 왕, 즉 북부여의 단군이다. 이 사실은 『환단고기』와 광개토태왕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수왕은 414년에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거대한 비석에 새겼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비문에 ‘출자북부여’라 적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몽의 원 뿌리는 북부여 해모수 단군이다. 북부여를 계승해서 고구려가 나왔다. 이것이 장수왕이 414년에 새긴 비문에서 확인되는 국통맥이다.

    해모수 단군과 주몽의 관계

    이제 해모수와 주몽의 관계를 규명해 보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의 남편이 해모수라 전한다. 그것은 동부여 금와왕과 유화부인의 대화 속에서 알 수 있다.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유화)를 만났다. 유화는 이렇게 아뢰었다. “저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입니다. 동생들과 함께 나와 노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저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으로 유인하여 은밀히 정을 통하고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기록은 주몽의 아버지를 해모수라 기록했다. 그런데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해모수는 주몽의 아버지가 아니라 고조할아버지라 전한다. 그럼 어느 것이 역사의 진실인가?

    [삼국사기 | 삼국유사]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다. [북부여기]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가 아니다.

    그것은 광개토태왕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혈통을 전하며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이라 했다. 환還은 ‘돌아보다’, 지至는 ‘이르다. 도래하다’는 뜻으로 대대로 왕위를 계승해서 17세를 내려와서 광개토태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아버지 광개토태왕은 원 창업 시조의 17세손’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세손 계보도를 살펴보면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20대 왕이자, 주몽의 13세손이다. 그런데 비문에는 ‘17세손’이라 했으니, 4대의 역사가 더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몽과 해모수 사이에는 세 분이 더 있어야 한다. 주몽과 해모수는 부자 관계가 아니라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몽이 원 시조,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17세손이 된다. 광개토태왕비의 고구려인의 역사인식과 부합하는 기록이 나오는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은 『환단고기』 뿐이다.


    [북부여의 국통을 계승한 고주몽(고추모) ]

    고리군왕고진稾離郡王高辰은 해모수지이자야解慕漱之二子也오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불리지沃沮侯弗離支는 고진지손야高辰之孫也니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개이토적만공皆以討賊滿功으로 득봉야得封也라.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으로 봉토를 받았다.

    불리지弗離支가 상과서압록嘗過西鴨綠이라가 우하백녀류화遇河伯女柳花하야 열이취지悅而娶之하고 생고주몽生高朱蒙하니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을 지나다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태백일사』와 『북부여기』를 보면 해모수가 있고, 그 아들 고진이 있고, 고진의 손자 불리지가 있고, 불리지의 아들이 바로 고주몽이라 한다. 이 「북부여기」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은 주몽의 13세손이요, 해모수의 17세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국통이 분명히 드러난다.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 건국 시기는?

    여기에 꼭 풀어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다. 해모수 단군이 북부여를 건국한 때가 언제냐 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북부여기」는 해모수 단군의 출세를 공통적으로 ‘임술壬戌 4월 8일’이라 전한다. 그러나 두 기록에 나오는 임술년은 사실 180년의 차이가 있다.

    『북부여기』: 임술(BCE 239)년 4월 8일 『삼국유사』: 임술(BCE 59)년 4월 8일

    그런데 『환단고기』「북부여기」에서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임술년보다 180년이 앞선 BCE 239년 임술년이라 한다. 이 두 임술년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광개토태왕비문을 유심히 봐야 한다. 결론적으로 비문을 검토하면 해모수와 주몽은 부자父子가 아니라 고조부와 현손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연대는 4대를 올려 잡아야 마땅하다. 그래야 연대가 맞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에 광개토태왕비문에 아로새긴 역사 정신인 ‘출자북부여’와 ‘환지십칠세손’은 『삼국유사』(BCE 59년)가 아니라 「북부여기」(BCE 239년)의 손을 들어준다. 대한인의 낭도郎徒 정신으로 기술된 「북부여기」가 역사 진실에 부합하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 ‘출자북부여, 환지십칠세손’

    [주몽개국] BCE 59년 + 4대(120년 이상) → BCE 239년 보통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 ‘환지십팔세손’에 따라 주몽과 해모수 사이에는 고진과 그 아들, 손자 불리지가 들어가야 한다. 이에 북부여는 고구려 개국인 BCE 59년보다 최소 4대, 120년 이상을 올려 잡아야 한다. 즉, BCE 179년 이전에 해모수가 건국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현 교과서는 지금까지 고구려의 뿌리인 북부여를 명확히 하지 않고 부여로 두루뭉술하게 기술하며, 그 건국 시기를 원래보다 180년이나 내려 잡았다. 만주 벌판에서 단군조선과의 어떤 연관성도 없는 부여가 태동되었다고 가르친다. 잃어버린 부여사 복원의 중심에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가 있다. 잃어버린 북부여사는 대한 국통의 단절과 연결의 분기점이다. 또, 북부여 개국이 BCE 239년이냐, BCE 59년이냐 하는 것은 쉽게 넘길 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북부여기」 기록(BCE 239년)은 위만이 망명(BCE 194년)하기 이전에 해모수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이 되지만, 『삼국유사』 기록(BCE 59년)은 위만정권의 패망과 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BCE 108년) 이후에 북부여가 개국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문헌과 금석문의 종합적인 관계를 무시한 단편 인용은 역사의 선후先後를 오판해 대한 국통의 단절과 왜곡의 빌미를 주게 된다. 사실 역사 왜곡의 바이러스는 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대한인은 소중화사관과 일제식민사관의 집요하게 주장하는 논리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① 기자箕子는 조선의 제후가 되어 문화를 가르쳤다. 고려 숙종 이후 유학자들은 기자가 평양에 온 것으로 믿고 사당과 묘소를 만들어 모셨다. ② 기준왕은 기자의 후손이며, 왕검성은 대동강 평양이다. ③ 위만은 준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라 고조선을 발전시켰다. ④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그 땅에 세웠다. ⑤ 한사군의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고구려는 출현했다.

    한마디로 주몽의 고구려는 지나족의 식민지에서 태동된 뿌리없는 국가가 된다. 중국인들의 사고체계는 위와 같다. 덧붙여진 『한서』「지리지」와 『삼국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소중화의 사관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위에 정리한 내용처럼 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윤내현 교수도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고려 숙종 이후 신진 사대부, 유학자들이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벌여진 역사의 뒤틀림이다.

    고려와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의 도읍과 위만이 찬탈한 왕험성이 같다고 인식해 위만조선과 한사군의 거점을 한반도 평양으로 설정했다. 이때부터 대한의 국통맥은 크게 왜곡·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잘못 인식된 북부여 해모수 단군의 자리를 차지한 번조선의 기준왕은 하루 아침에 초대 단군 이후 다시 등장한 대단군이 되었고, 이를 몰아낸 위만은 단군조선의 정식 계승자가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해 기자의 후손 기준왕, 기준왕의 보좌를 빼앗은 위만·우거왕 그리고 한무제의 한반도 한사군설이 대한 교과서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런 체계를 계승한 현 교과서의 대한 상고사 국통은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뿐이다. 이제 대한의 상고사(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와 삼국시대를 연결해 주는 목뼈와 같은 부여사 180년을 사실 그대로 복원시켜야 한다. 잃어버린 해모수 단군의 북부여를 되찾아, 대한 국통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고구려의 뿌리는 현도군이 아닌 북부여다

    결론부터 말해 고구려의 뿌리는 지나족의 주장대로 현도군이 아니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에서 주몽이 나왔다는 기록은 없다. 이는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고구려 역사 정신을 새긴 광개토태왕비는 분명 ‘출자북부여’라 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록도 있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세기』(고려 이암 저)와 『삼성기 상』(신라 안함로 저)에는 고구려가 북부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지나족 주장

    고구려는 현도군에서 나왔다.

    급한무멸조선及漢武滅朝鮮 이고구려위현以高句麗爲縣 속현도군屬玄菟郡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킴에 이르러 고구려를 현으로 하고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한 『통전通典』)

    대한 낭가 기록

    해모수 고향이 고구려다.

    고구려高句麗는 내해모수지생향야乃解慕漱之生鄕也라 고故로 역칭고구려야亦稱高句麗也니라. 고구려는 해모수께서 태어난 고향이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불렀다. (『단군세기』)

    주몽은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모셨다.

    지계해춘정월至癸亥春正月하야 고추모高鄒牟가 역이천제지자亦以天帝之子로 계북부여이흥繼北夫餘而興하사 계해(단기 2276, BCE 58)년 봄 정월에 이르러 추모(고주몽)가 역시 천제의 아들로서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복단군구장復檀君舊章하시고 사해모수祠解慕漱하사 위태조爲太祖하시고 시건원始建元하사 위다물爲多勿하시니 시위고구려시조야是爲高句麗始祖也시니라. 단군의 옛 법을 회복하고, 해모수를 태조로 받들어 제사 지내며 연호를 정하여 다물이라 하시니, 이분이 곧 고구려의 시조이시다. (『삼성기 상』)

    고구려 선조는 해모수(북부여)로부터 나왔다.

    고구려지선高句麗之先이 출자해모수出自解慕漱하시니 해모수지모향解慕漱之母鄕이 역기지야亦其地也라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왔는데,해모수의 고향이 또한 그 땅(고구려: 地名)이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삼국사기』가 전하는 가언충의 고구려 900년 설

    가언충賈言忠은 당 고종에게 이번에는 반드시 고구려가 무너질 것이라 보고한다. 이때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 900년 설을 전했다.

    금남생형제혁한今男生兄弟鬩狠 위아향도爲我郷導 노지정위虜之情僞 아진지지我盡知之 지금은 남생의 형제(남생, 남건, 남산)가 서로 싸워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서 오랑캐의 진정과 거짓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장춘사력将忠士力 신고왈臣故曰 필극‘必克.’ 장수는 충성되며 병사는 힘을 다하니 신이 처음부터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차고구려비기왈且高句麗秘記曰 불급구백년‘不及九百年 당유팔십대장멸지當有八十大將㓕之’ 또 『고구려비기』에 말하기를 ‘900년이 되지 못하여 마땅히 팔십 대장이 있어서 이를 멸망시킨다.’고 하였는데,

    고씨자한유국高氏自漢有國 금구백년今九百年 적년팔십의勣年八十矣 고씨가 한으로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은 지 지금이 900년이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668년 결국 고구려는 이적 장군에게 무너졌다. 이때 고구려의 궁궐과 사적은 불태워지고, 왕과 신하들은 당나라로 끌려갔다. 아픈 역사 기록이지만 여기에도 원 역사맥을 찾을 단초가 있다. 바로 고구려 900년 설에 따라 광개토태왕비와 『환단고기』의 ‘출자북부여’, ‘출자해모수’라는 기록의 신빙성을 확보하게 된다. 고구려는 원시조인 북부여 해모수 단군부터 보장왕까지 907년간 지속했다.

    동명왕은 주몽인가? 고두막한인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명東明과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즉 동명성왕東明聖王, 동명제東明帝가 주몽이며 북부여를 계승해 고구려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연산군 때 문관 김천령金千齡이 지은 글에는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시대 각기 다른 인식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동명과 주몽은 같은 인물인가? 다른 인물인가?

    동명성왕이 주몽이다.(『삼국사기』)

    시조동명성왕始祖東明聖王 성고씨姓高氏 휘주몽諱朱蒙(일운추모一云鄒牟 일운중해一云眾解)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고구려본기」)


    동명제는 주몽이다.(『삼국유사』)

    동명제계북부여이흥東明帝繼北扶餘而興 입도우졸본주立都于卒本州 위졸본부여爲卒本扶餘 즉고구려지시卽高句麗之始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졸본에 도읍을 정하시니 졸본부여이고 곧 고구려의 시작이다.

    그런데 동명과 주몽이 다른 인물임을 전하는 고구려 시대의 결정적인 유물이 있다.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산淵男産(639~702)의 묘비가 1921년 중국 낙양 북망산에서 출토된 것이다. 연남산 묘지명은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준다.


    먼저 고구려인은 동명東明과 주몽朱蒙을 서로 다른 인물로 알았다는 것이다. 묘지명에는 “동명이 기를 느끼고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이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고 했다. 또 이 묘지명은 『환단고기』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명증해 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없는 연개소문 일가의 혈통을 정확하게 기록했기 때문이다.

    연남산 묘지명에 있는 혈통: ‘증조曾祖자유子遊 조祖태조太祚’ 증조부의 존함은 자유이고, 조부의 존함은 태조이다.

    『조대기』에서 전한 연개소문 선조: ‘조祖자유子遊부父태조太祚’

    조대기朝代記에 왈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일운개금一云蓋金이니 성姓은 연씨淵氏오 기선其先은 봉성인야鳳城人也라 『조대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이고, 선조는 봉성 사람이다.

    부왈태조父曰太祚오 조왈자유祖曰子遊오 증조왈광曾祖曰廣이니 병위막리지並爲莫離支라」 아버지의 이름은 태조이고,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부는 광인데 모두 막리지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그럼 부여사에 숨겨진 동명왕 고두막한은 누구이며, 어떤 공덕을 남겼는가?

    [동명국 고두막한에 관한 ‘환단고기’ 기록]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도적을 격파했다.

    계유십삼년癸酉十三年이라 한유철漢劉徹이 구평나寇平那하야 멸우거滅右渠러니 잉욕역치사군仍欲易置四郡하야 성이병盛以兵으로 사침四侵이라.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나라 유철(무제)이 평나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왔다.

    어시於是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야 소지所至에 연파한구連破漢寇할새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유민遺民이 사응四應하야 이조전以助戰하니 군보대진軍報大振하니라.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북부여기』)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키고, 동명국을 세웠다.

    지계유한무시至癸酉漢武時하야 한漢이 이병移兵하야 멸우거滅右渠할새 계유(단기 2226, BCE 108)년 한무제 때 한나라가 쳐들어와 위만의 손자 우거를 멸하였다.

    서압록인고두막한西鴨綠人高豆莫汗이 창의흥병倡義興兵하사 역친단군亦稱檀君하시고 이때 서압록 사람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또한 단군이라 칭하였다.

    을미한소시乙未漢昭時에 진거부여고도進據夫餘故都하사 칭국동명稱國東明하시니 시내신라고양야是乃新羅故壤也라. 을미(단기 2248, BCE 86)년 한나라 소제 때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도읍을 점령하고 나라를 동명이라 칭하시니, 이곳은 곧 신라의 옛 땅이다. (『삼성기 상』)

    고두막한은 BCE 108년 한 무제가 번조선 강역의 위만정권을 멸하고, 단군조선의 본조(북부여)를 공격해 올 때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등장해 한 무제의 동방원정을 무력화시켰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처럼 5만 7천의 한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북부여를 지켜낸 영웅인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의 공덕을 높여야 했던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이를 누락시키고, 다만 위만정권 관련 기록만 남겼다. 한 무제의 눈치를 보며 승리한 기록만 남기고 패배의 아픔은 지워버린 것이다. 한나라 대군을 지휘한 한나라의 두 장수의 말로가 역사의 진실을 반증한다.

    동명왕 고두막한의 용병술에 한나라 군대는 동진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위만정권을 멸한 번조선 강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 교과서는 동명왕 고두막한의 영웅적인 이야기가 사라졌고, 한 무제 군은 이른바 ‘위만조선의 수도’인 한반도 평양성을 침공해 빼앗은 것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낭가의 기록은 이것이 아니라 한다.

    역사는 문헌과 유물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연남산의 묘지명, 『북부여기』 기록을 큰 안목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진실이 드러난다. 부여사를 잘 아는 사람은 대한 국통을 찾을 수 있다. 지나족의 붓장난을 넘어 잃어버린 맥을 복원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부여사를 정리하면 북부여北扶餘는 단군조선의 국통을 계승하여 해모수가 세운 나라이고, 동명왕 고두막한은 한 무제군을 막은 북부여의 5세 단군이다.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단군이 될 때, 해부루(해모수의 증손, 4대 고우루 단군의 동생)는 고두막한에게 왕위를 넘기고 동쪽으로 이동해 동부여를 열었다. 북부여 해모수의 혈통인 주몽은 동부여에서 태어나 북부여 고두막한의 아들인 고무서(북부여 6세) 단군의 사위가 되어 북부여를 계승하였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로 계승되는 것이 대한의 정통 맥이다.

    대한의 국통이 살아있는 교과서가 나와야

    현 교과서 속 대한의 국통맥國統脈은 온전하지 못하다. 단군조선도, 북부여도, 고구려로 이어진 국통을 잡을 수 없다. 북부여가 잘려나간 곳에 떠돌이 도적 위만정권이 자리 잡고, 한반도 한사군설이 진실인 양 가르친다. 현 교과서에는 왜 잘못된 역사가 기술되었을까? 그것은 대한의 정신으로 기록된 『환단고기』 속의 우리 문헌들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근본 원인이 있다. 고려의 행촌 이암과 조선 중종 때의 찬수관인 이맥이 기록한 대한사관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안타깝게도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역사책을 뼈대로 삼는다. 그리하다 보니 중화사대주의에 따라 기술된 『삼국사기』와 불교 관점으로 오도된 『삼국유사』의 한계성을 넘지 못한다. 더구나 일제식민사관의 바이러스까지 깊이 들어와 대한의 교과서는 큰 상처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중화사관과 소중화사관, 그리고 일제식민사관을 벗어던지고 인류사에 당당한 대한의 역사 문화를 선보여야 한다. 이제 단군조선에 관한 잘못된 역사상식을 깨야 한다. 이제 대한의 진정한 역사광복을 이뤄야 한다. 깨어난 대한인의 눈으로,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작한 단군신화, 한반도 위만조선설, 한반도 남부 진국설 등 그릇된 학설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역사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을 넘어선 대한사관의 교과서로 가르쳐야 한다. 국통맥이 단절된 교과서, 배은망덕을 중심에 놓은 잘못된 교과서로 대한의 후손을 계속 가르쳐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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