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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HOME 오피니언 칼럼유철 박사의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論駁 마지막회

『환단고기』 위서론 논박論駁 - 만들어진 위서론

앞에서 본 것처럼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환단고기』 위서 논거는 그들이 역사학자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조잡하기 그지 없다. 앞에서 예로 든 대표적인 몇 가지 외의 다른 위서론도 존재하지만 거의가 대동소이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서론은 학술 이론이 아니라 학문적 비판으로 위장한 ‘『환단고기』 조작설’에 불과하다.


1. 위서론 바이러스

『환단고기』가 출현했을 때 역사학자들을 당황하게 한 것은 그 내용이 기존의 역사학적 사실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중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으며 소위 『환단고기』 열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순근은 그 상황을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만주지역 전체와 북동중국 일부 및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걸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어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왔으며, 특히 일간신문이나 텔레비전 등이 이러한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적극 보도하고 더 나아가 학계에 수용을 강요함으로써, 이 문제는 학문적 관심사를 떠나 사회적, 정치적 관심사로 급속도로 확대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인성 역시 “이들은 소개되자 마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환단고기』는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일부 서점에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그리고 그것들과 유사한 내용의 서적들만을 취급하는 독립된 서가를 만들 정도였다.”고 말한다.

1985년 김은수의 『주해 환단고기』는 『환단고기』를 번역하고 그 주요 내용에 주석을 단 최초의 책이었다. 1986년에는 임승국의 『환단고기』 주해본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는 『환단고기』 대중화에 기여했다. 강단 사학자들 몇몇은 바로 『환단고기』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환단고기』 열풍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도학을 필두로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선전하고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서론의 전파에 대해 안경전은 ‘위서론 바이러스’라고 규정한다.

그때부터 마음 속에서 한 가지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오늘의 역사학계가 왜 『환단고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한마디로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위서론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지식인과 문화인 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환단고기』는 위서라며?”라고 말하며 『환단고기』를 의심하고 비방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다.

이 바이러스는 『환단고기』를 죽이기 위해, 그리고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막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단 바이러스가 퍼지면 쉽게 막기 힘들다. 또한 백신을 만드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80년대 말에서 90년대를 거쳐 『환단고기』는 조작된 역사책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채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위서론 바이러스가 치명적이기는 했지만 이도학은 『환단고기』에 대해 ‘그렇지만 『환단고기』를 전면 부정하기는 아쉬운 구석이 남아있다. 그 이유는 『환단고기』 가운데 『태백일사』에서 발견하게 된다’고 옹호적인 말을 하다가, 몇 년 후에는 조인성의 위서론 주장에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부정적으로 돌아선다. 역사를 전공한 학자 조차 자신의 학문적 양식을 뒤바꿀 정도니 일반인의 경우에 위서론 바이러스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최근 뜻있는 학자들이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고 고증함으로써 『환단고기』 위서론의 오류가 조목조목 밝혀졌다. 그 뿐 아니라 『환단고기』는 한민족의 고대사를 밝히는 전통 사서가 분명함을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환단고기』를 전면적으로 옹호하는 학자는 박성수, 박병섭, 송호수, 임승국, 고준환 등이며, 이외에도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위서론을 비판하는 부류가 있는데, 박창범, 나대일, 신원봉, 이상시, 민영현, 박정학 등이다. 그들은 『환단고기』를 부정하는 강단 사학계의 의도를 간파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환단고기』의 가치를 검토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위서론자들은 단지 식민사학의 아성이 송두리째 무너져서 자신들의 성과와 지위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진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은 그들에게 우롱과 사기를 당한 것이다. 위서론 바이러스의 해독제, 백신은 오직 인류 원형 문화의 진리의 혼불을 밝힌 『환단고기』를 순수한 한국인의 마음으로 제대로 읽고 실천하는 것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대 접어들어 위서론은 사그라 들고 있는 분위기다. 조인성 등 소위 위서론자들은 그 이후에 『환단고기』와 관련해 별다른 발표를 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환단고기』의 진실성을 주장하는 논문이 계속해서 발표되면서 대중들에게 퍼진 위서론 바이러스도 치유되고 있다. 

특히 안경전의 『환단고기』 역주본은 오랜 기간의 연구와 번역으로 『환단고기』의 가치를 확인하고 어려운 내용은 주석을 달아 『환단고기』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2. 위서론의 허구성

위서론이 주장하는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 논거는 모두 논박될 수 있었다. 그들이 처음 『환단고기』를 부정하고자 위서론을 만들 때는 자신들의 논리로 충분히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 가지 문제는 그들 스스로 잘못된 논리임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글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위서론이 유효한 이론으로 취급되었다.

특히 그들이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한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내세운 것은 1911년 계연수에 의해 목판본으로 제작된 『환단고기』 초간본이 존재하지 않고, 필사본만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결론은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도학은 『환단고기』가 1920년대 말 이후에 저술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1931년 이후에야 비로소 그 소장자인 이유립이 그것에 대한 구상이라도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인성은 「천남생묘지」의 기록, 근대용어의 사용, 영고탑 등의 위서론을 주장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미 의심하였던 바와 같이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택백일사』 등을 짓고, 그것들을 모아 『환단고기』를 편찬한 것일까...그렇다면 『환단고기』는 1920년대 말 이후에 이유립에 의해 저술 편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환단고기』가 1949년 정서되었다고 하므로 이유립은 1949년 이전 멀지 않은 시기에 『환단고기』의 초고를 작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것을 수정 보충하여 1979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물론 말그대로 추측이다. 그 추측이 잘못된 것임은 이미 앞에서 논박되었다. 그럼 위서론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즉 왜 그들은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저술했다고 믿는가? 위서를 만들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글 서두에서 위서는 ‘의도적으로 조작된 문서’라고 정의했기에 그 의도를 밝히는 것은 위서인가 아닌가를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이다. 이 절에서는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저술한 이유 혹은 의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서 왜 위서론이 허구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먼저 위 조인성의 생각에 동의하는 박광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는 글에서 『환단고기』를 언급하며 “한말 이후 위조되었거나 가필되었을 가능성의 문제와 그 서술이 민족해방투쟁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적 사상으로서의 위치와 기능 부분을 중심을 하여 검토”한다고 밝히면서 그 이유를 몇 가지 거론하는데 다음과 같다.

1911년 계연수가 썼다는 범례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계연수는 (범례에서) “세계 인류가 대등하게 모여서 함께 존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이다.”라는 부분은...『단군세기』 서문에서도 “세계만방과 더불어 같이 베풀고 함께 즐겼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조선인이라면 친일파를 제외한다면 누구든지 그야말로 강도이며 적敵인 일본제국을 앞에 두고 죽을때까지 적극 투쟁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본 민족도 포함하는 세계인류의 대등한 공존을 위한다는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논리를 내세운 것이라는 말이 된다...이는 적극적인 투쟁을 무의미하게 보는 논리 내지 일단 유보하자는 논리로 기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1911년이라면 항일민족투쟁의 방략을 흐려놓는,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 조인성 교수의 지적대로 1949년 전후의 해방공간의 시기에 쓰여졌다면 이 논리는 일본 민족적 역사체험도 우리가 수용하면 된다는 식으로서 결국 일제 잔제의 청산은 내세우지 않아도 자연히 된다는 논리일 수밖에 없다.

문장 구조 조차 엉성한 이 인용문에서 우리는 위서론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박광용은 계연수의 ‘범례’를 곡해하고 있다. 박광용이 인용한 ‘범례’의 마지막 구절의 뜻은 『환단고기』의 출간으로 인류 역사의 시원과 한민족사의 정통을 드러내니 축하할 일이며, 『환단고기』의 내용은 전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것이라는 의례적인 축하의 글이다. 이를 일본을 친구로 생각하고,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판단한다면 엄청난 난독증難讀症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박광용의 논리는 계연수의 ‘범례’가 1911년에 쓰여진 것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박광용의 자기모순이다. 더 나아가 ‘범례’가 1949년 이후에 쓰여졌다는 가정 하에 『단군세기』 서문의 내용은 일제청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말 실소가 나올 뿐이다. 위서론이 조잡한 허구라는 좋은 증거이다.

그리고 『태백일사』의 내용에서 일본의 기원을 단군시대 한민족이 건너가 세운 것으로 기록한 것을 근거로 “일본인의 전통사상인 일본 신도도 단군 신교의 맥이 흐르고 있다는 주장은...일본과 조선의 문화가 그 근원이 같다는 한일문화동조론이다...『환단고기』는 역시 신일본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친일적 민족주의의 요소가 강한 책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이순근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여 “『환단고기』가 일본군국주의 부활과 팽창 및 이와 연대한 우리나라에서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와 연계된 것이라는 현대사적 지적은 충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제정신을 가진 한국인이라면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또한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주장들이다. 일본이 한민족의 귀화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대동아공영론’으로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위서론자인 이도학은 이러한 박광용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이른바 대동아공영론과도 결부지어 친일적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은 지나친 추론이 아닌가 생각된다.”라고 말한다. 최소한의 양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환단고기』가 친일사상을 위해 만들어진 위서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허구이다. 이유립은 독립운동가 계연수의 제자이며 독립군 통신원을 한 독립운동가인데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환단고기』를 조작했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 이는 『환단고기』의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면 알 수 있고, 또 왜 『환단고기』가 발표되었을 때 온국민이 열광했는지를 생각하면 박광용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 다음 위서론의 허구성은 ‘단군신앙의 관점에서 서술된 위서’라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조인성은 『단기고사檀寄古史』나 『신단실기神檀實記』와 비교하면서 “우리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다. 단군신앙의 입장에서 각종 기록, 학설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두 책은 우선 『신단실기』와 유사하다. 하지만 『단기고사』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위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신단실기』보다 더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환단고기』는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의 한국 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고 단언한다.

더 나아가 그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단기고사』, 『규원사화』를 비교 분석하면서 이들 서적들이 모두 단군과 관련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저술되었다고 말한다. 결론은 『단군세기』는 그보다 앞서 나온 『단기고사』, 『규원사화』를 보고 쓴 위서라는 것이다.

『단기고사』를 참고한 『단군세기』는 일러도 『단기고사』가 쓰여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고려 말 이암의 저술임을 표방한 『단군세기』는 위서인 것이며, 그것의 사료 혹은 역사서로서의 가치는 전혀 인정할 수 없다. 나아가 『단군세기』가 실려있는 『환단고기』 역시 그러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환단고기』는 단군계통의 종교단체를 위한 종교서적으로 위조된 것인가?

단군신앙 관련 종교로 분류되는 근대의 움직임은 바로 대종교였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대종교는 우리 삼신三神 시조始祖를 신념信念하는 최고最古의 종교이다...그 신조信條는 그 족성族性과 국성國性을 보지保持하는 것이다.”고 대종교를 정의한다. 대종교의 교리가 이러하다면 『환단고기』는 그들의 종교 교리와 사상 및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진다. 즉 둘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계연수나 이유립은 대종교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환단고기』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기와 계연수는 함께 단학회를 조직한 핵심 멤버였다. 이기는 1909년 나철과 함께 대종교 중광重光에 참여했다. 이기가 죽은 뒤 계연수가 중심이 되어 단학회를 창립하고 이유립은 계연수 사후 단학회의 중심이 되었다. 이유립은 월남후 단학회를 단단檀檀학회로 개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저술하였다는 결론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일단 『단군세기』와 그 저자 행촌 이암을 연구한 한영우의 주장은 조인성과는 전혀 다르다.

역대 단군의 치적을 서로 비교해보면, 『단군세기』와 『단기고사』는 서로 공통되는 내용이 있으나, 『규원사화』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다루고 있다...그렇지만 세 책이 단군 이름이 모두 같다는 것은 결국 세 책이 한 가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을 암시한다...단군조선의 47대 왕명王名을 적은 책이 원래 있는데, 이 책을 토대로 하여 각 단군의 제위 년한과 업적을 두 가지 계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내용이 상대적으로 소략하고, 현대적 감각이 덜한 『단군세기』가 먼저이고, 현대적 감각이 지나치게 투영된 『단기고사』는 『단군세기』를 토대로하여 윤색되지 않았다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같은 주제를 연구했지만 서로 상반된 견해에 도달한 것이다. 조인성은 『단군세기』가 가장 후대의 저술이라고 하면서 완전히 조작된 책이라고 주장한 반면, 한영우는 『단기고사』가 『단군세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으며, 원본의 존재를 인정했다. 즉 『단군세기』가 한말 일제 강점기 이후 지식인의 손을 거쳐 윤색, 가필되었다는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을 전적으로 위서로 판정하는 것은 삼가야 하며, 『단군세기』도 행촌이 지은 모본을 토대로 후세인들이 중층적으로 가필 윤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라고 말한다.

위서론자들이 『환단고기』를 단군신앙 관련 위서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환단고기』에 대종교 교리와 유사한 술어들, 예를 들어 박광용은 ‘환인의 조화, 환웅의 교화, 단군의 치화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생각나게 하며, 삼신 일체론 부분은 기독교에 대한 단군신앙의 교리적 대응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대종교의 교리체계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삼신일체사상을 근거로 『환단고기』를 대종교 관련 위서라고 할 수는 없다. 우대석은 임승국의 논문을 참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위논쟁의 또 다른 쟁점은 교리체계다...『환단고기』에는 삼위일체니, 삼신이니 영혼靈魂, 각혼覺魂, 생혼生魂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니 하는 기독교 교리에서나 볼 수 있는 용어가 발견되고 있다...그러므로 『환단고기』는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이다...그러나 삼신三神이니, 영혼이니 하는 단어는 이미 우리 민족이 수천 년 전부터 써오던 단어다. 기독교 고유의 용어가 아니다. 영이나 혼, 또는 삼신은 우리 고유의 문화적 단어다.

위서로 몰기 위해서는, 그리고 위서라는 근거라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작은 의혹도 부풀려서 제기하는 것이 위서론자들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제대로 연구하지 않은 결과라면, 짧은 식견에서 나온 실수라면 위서론 자체는 성립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의 위서 주장은 『환단고기』를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종교의 교리체계인 삼신일체사상三神一體思想이 『환단고기』에 나오므로 『환단고기』는 대종교 관련자들이 만든 위서라는 주장은 아무런 논리적, 인과적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단군관련 내용이 나오는 사서가 모두 대종교 관련 위서라고 믿는 것과 같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상에서 밝힌 것처럼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저술했다는 위서론자들의 주장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인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 대동아공영권 등 친일적 주장을 위해 만들어진 사서;라는 주장과 ‘『환단고기』는 단군신앙과 대종교 교리를 위해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또 상식적으로도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의도적 부정을 위한 논리 전개로 『환단고기』 바이러스를 전파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위서론은 『환단고기』 조작설을 위해 조작된 허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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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환단고기』 진서론眞書論 검토

우대석은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고 저술 시기도 삼국시대 이후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것이지만 이를 위서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 『사기』나 『한서』의 삼황오제설 역시 한나라 때 ‘만들어진’ 설이란 것이 인정된다는 점을 들면서, 만약 『환단고기』 위서론의 기준이라면 이들 사서 역시 위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도학은 위서론자이긴 하지만 『환단고기』의 가치를 일면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환단고기』란 글에서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나오는 장수왕의 연호 건흥을 예로 들면서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명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그리고 『태백일사』에서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 할아버지는 자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는 내용을 『조대기』에서 인용한 것을 거론하면서 이 중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태백일사』 외에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1923년 중국 남양에서 발견된 연남생묘지의 기록과 일치하므로 『태백일사』의 기록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특히 그는 같은 위서론자인 박광용이 『환단고기』 위서론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잠청배’라는 개념을 거론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즉 박광용이 ‘잠청배’라는 개념은 『환단고기』가 친일주의적 조작물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다.

이덕일은 치우와 관련된 『환단고기』 내용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분석한 결과 『환단고기』 기록을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환단고기』 위서론이 가진 한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환단고기』 내용 들 중)다른 것도 그런 방법론으로 사실인가 아닌가를 연구해야 하는거죠. 그런데 우리는 한두 가지를 끄집어 내서, 전부를 부정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해왔죠.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위서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그 내용 전체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작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환단고기』의 치우관련 기록과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치우관련 기록의 내용을 다른 주요 사서들과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내용의 신뢰성을 고증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론은 『환단고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즉 치우와 헌원의 탁록전투에서 치우가 승리했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으며, 헌원이 승리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헌원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치우천황은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청구靑丘(현 대릉하 유역)로 옮겼다. 치우가 탁록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치우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져 복종할 정도로 위용을 떨친 ‘병법의 시조’로서, 동이족은 물론 중국에서도 숭배하고 추앙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3,000년 전 주周나라 개국의 일등 공신이며 병법의 중시조인 강태공은 제나라 왕으로 봉해진 뒤 치우천황을 팔신八神 중 하나인 병주兵主로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한 고조 유방은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내고서 진秦의 수도 함양을 평정했으며, 천하를 얻은 뒤에는 장안長安에 치우 사당을 짓기까지 했다. 만일 헌원과의 전쟁에서 치우가 패했다면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병법의 시조로 받드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만약 사실이 이러하다면 과연 어느 것이 위서인지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앞에서 의도적으로 그 내용을 조작한 경우에 그것을 위서라고 규정한다고 했다. 사마천의 기록은 누가 보더라도 중국의 조상을 영광되이 만들기 위해 사실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임이 분명하다.

『사기』에 「삼황본기」가 실려있지만 이는 후대 사마정의 가필이며, 사마천은 「오제본기」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역시 당대 육학자들은 오제에 관한 기록도 삼황에 관한 기록처럼 허황된 전설로 믿었으므로 이 또한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더욱이 지금의 『사기』는 수없이 많은 판본이 전해졌고 그 주석도 많아서 남북조 시대에 이미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특히 『사기』의 주석서 중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는 “응소應邵는 ‘치우는 옛날의 천자이다’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치우가 헌원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반증이다. 어느 것이 위서인가?

인채우는 “『환단고기』에는 동물, 인간, 신으로서의 다양하면서도 때로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가진 곰의 모습들이 여과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환단고기』의 비체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환단고기』가 일인일시一人一時의 위작이 아닌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오던 여러 기록들이 편집되어 전해진 것이란 증거로도 삼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박병섭, 박병훈은 “『환단고기』는 진서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근대의 올바른 역사 연구서인데 만일 근대의 역사 연구가의 솜씨라면 그가 사학연구사에서 천재라는 것은 『환단고기』 기록에 교묘하게 숨겨둔 솜씨로 보아 거의 99%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위서론을 비판한다. 그 내용으로 볼 때 『환단고기』는 절대로 근대에 저술될 수 없는 책이며, 따라서 진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위서론은 없다. 진서론도 없다. 다만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문화와 사상을 기록한 『환단고기』가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위서론은 만들어진 허구이며,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사서가 진서라고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남은 과제는 『환단고기』를 깊은 애정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연구해서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원형을 찾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김부식, 『삼국사기』
김은수, 『환단고기』, 가나출판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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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대전: 상생출판, 2013.
오끼 야스시, 김성배 역, 『사기와 한서』, 서울: 천지인, 2010.
이덕일 김병기,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서울: 역사의 아침, 2006.
일연,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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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창, 『사기의 세계』, 대구: 영남대출판부, 1988.

 

2. 논문

민영현, 「철학사상으로 본 『환단고기』의 가치」, 사단법인 한배달 2009년 학술회의 자료집
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1992,
방볍섭, 「치우천왕과 운사 헌원 사이의 관계(2)」, 『선도문화』 제12권
박병섭, 박병훈, 「『환단고기』의 역사적 전승과정」, 사단법인 한배달 2009년 학술회의 자료집
송찬식, 「위서변」, 『월간중앙』, 197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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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딴지 라디오 벙커 1특장 이덕일 역사학자 특장(2013년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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