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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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논문

                            고종 황제가 경운궁(慶運宮)을 세운 뜻


                          극일(克日)과 대청(對淸) 독립 의지



                                  (이태진 국학연구론총 제10집 2012.12.31)










                                                                                    정리. 송옥진 기자

              한양 내 조선의 궁궐들은 유교 정치사상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종 황제는 조선왕조
            따라 북쪽 산자락에 자리하지만, 경운궁은 도                     가 오랜 세월 유지해 온 명·청의 책봉–조공 체

            심 중심부에 위치하며 그 건축 구성도 남다르                     제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국으로 나아가기 위
            다. 경운궁은 전통 한식 건물과 서양식 건물이                    해 경운궁을 새로운 본궁으로 선택하였다. 특

            혼재되어 있어, 중앙의 중화전을 중심으로 동                     히 경운궁 동편에 자리한 원구단은 황제가 하

            측으로는 한식 건물이, 서측으로는 서양식 건                     늘에 제사를 올리는 장소로, 500여 년간 이어
            물이 배치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또한, 다른                    진 명·청의 책봉 체제를 청산하고 대한제국으

            궁궐들이 정문을 남쪽에 두었던 것과 달리 경                     로 재출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한다. 고

            운궁은 동쪽 대안문(大安門, 후에 大漢門)이 실질                  종의 이러한 결단은 서양의 기계문명 수용 의
            적 정문 역할을 하며,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은                   지, 청국 독립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일본의 침

            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라진 상태이다. 이러                    략주의에 대한 극일(克日) 의지가 삼박자로 작

            한 구성적 변화는 서양 문명의 수용과 서울 도                    용한 결과이다. 1882년 미국과의 수호통상조
            시 개조 사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인데, 초대 주                   약 체결부터 시작하여, 영국·독일·러시아·프랑

            미공사 박정양 팀이 워싱턴 D.C에서 체험한 바                   스 등 서방 열강과 연이어 체결한 조약들은 전
            로크식 방사상 도로체계를 서울에 도입하면                       통적 책봉 조공 체제를 대체하는 근대적 외교

            서,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재탄생하                      질서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더불어 1897

            였다. 도시 구획 재편 및 도심 속 광장 조성, 주                 년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
            요 도로 확충 등 물리적 변화는 서울의 전반적                    고 1899년 한·청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중국과

            모습과 함께 경운궁의 상징적 가치를 높였다.                     의 오랜 종속 관계를 공식적으로 종식시키는
            정치사적 관점에서도 경운궁은 단순한 건축물                      등 고종은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국격 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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