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3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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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 추진하였다. 결과적으로 경운궁은 단순 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등 청국 종속
한 건축적 선택을 넘어, 서울 도시 개조와 근대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독립국으로 도약하려는
국가 체제 전환의 상징적 중심지로 자리매김하 의지를 구체화하였다. 이와 함께 을미(1895), 병
였는데, 이곳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의 만 신(1896), 정유년(1897)에 걸쳐 다수의 고유문(告
남 속에서 자주·독립 의지를 실천하고자 한 고 由文)과 제문(祭文)이 작성되었는데, 이 기간에 작
종의 정치적 결단과 외교 전략이 집약된 공간 성된 원구단 고유(告由) 제문 가운데 일본의 만
으로 평가된다. 행에 앞잡이 노릇을 한 역신 무리에 대한 응징
1893년 10월 4일, 고종은 왕비와 왕세자, 을 곧 제국 탄생의 초석으로 간주하는 표현이
왕세자빈을 대동하고 경운궁을 찾아 300년 전 자주 보인다. 즉, 이들 제문은 왕비 시해의 참
선조의 환도 행사를 기리는 하례를 올렸다. 이 극을 극복하고 국가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결
는 고종이 재위 중 처음으로 경운궁에 특별한 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결국 경운궁은 고종 시
관심을 보인 사건으로 고종은 선조의 국난 극 대 서양 신문명의 수용 의지와 함께, 일본 침략
복 의지를 계승하고 일본의 외압에 맞서기 위 에 대한 특히 왕비 시해 사건 이후 극일의 의지
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고자 경운궁을 방문 를 담으면서 대청(對淸) 자주·독립 의지를 상징
하여, 과거의 아픔을 씻어내고 새로이 나라 하는 대한제국의 본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를 세우겠다는 다짐을 펼쳤다. 그러나 곧이어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 일대 공간은 대
1894년 동학농민군 봉기와 일본군의 경복궁 한제국의 근대화 의지와 청국, 일본으로부터의
침입, 1895년 일본인에 의한 왕비 시해 사건 압박을 벗어나 자주 독립국으로 자리 잡기 위
등 극심한 외압과 참극이 이어지면서, 고종은 한 노력으로 가득 채워졌던 곳이다. 한편, 일본
300년 전 임진왜란에 버금가는 또 다른 ‘왜란’ 침략주의가 그 의지를 꺾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병합해 버린 폭력의 역사가 서린 곳이기도 하
고종은 일본군과 일본 공사관의 압박에서 벗 다. 경운궁과 정동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
어나기 위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국의 서양 신문명 수용의 근원지라는 문화사적
일시적 거처를 이전하고, 내각제를 혁파하며 향기가 풍기는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왕권을 회복하는 등 국정을 재정비하기 시작하 를 모방한 일본의 팽창주의의 발길이 어지럽게
였다. 그 과정에서 경운궁을 본궁으로 삼고, 경 깔려 있는 공간으로서 한국인이 쉽게 잊기 어
복궁에 있던 진전(眞殿 :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려운 기억이다. 이러한 아픈 기억에 대해 일본
헌종의 어진 모시는 곳)과 왕비의 빈전(殯殿)을 옮기 인들은 이 공간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있기를
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였으며 원구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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