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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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는 그들을 ‘폭도’로 매도했습니다. 누가, 왜 그리 불렀는지를 묻고 바로잡아야 합니

                       다. 1894년 동학군의 2차 봉기는 고종대왕으로부터 전달된 거의밀지(擧義密旨)를 받고
                      일어난 봉기였습니다. 즉, 임금의 비밀 명령을 받고 의롭게 일어난 군대였다는 뜻입니

                       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동학군은 단순한 민중 세력이 아니라, ‘조선 왕실의 군사적

                       신임을 받은 조직’으로 규정되어야 마땅합니다.



                       역사에서 삭제된 고종대왕의 결단
                        동학 1차 봉기가 해산된 직후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한양 경복궁을 침범하

                       고 조선의 왕을 생포하였습니다. 이후 임금의 도장을 탈취하여 가짜 칙령을 만들어 국

                       정을 장악하였고(친일괴뢰내각), 그 명령들이 이후 동학군 진압 명령으로 둔갑하게 됩니
                       다.

                        그러나 그 직전에 고종대왕께서는 전봉준에게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의로써 일어나 나를 구하라.”



                        이 명령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에 발생한 누란에, 조선의 역사가 끝나

                       가는 시점에 고종대왕은 마지막까지 주권을 지키고자 동학군에게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한 지시가 아닌, 조선의 명운을 걸고 건넨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이 밀
                       지를 통해 동학은 2차 봉기를 결행하였고, 그들은 단지 농민이 아니라 조선을 지키기

                       위해, 임금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 의군이 되었습니다.



                       청군 차병, 권귀의 강취

                        조선말, 대한제국 시기 가장 왜곡된 역사 중 하나는 ‘고종이 청군을 불러 동학군을
                       진압했다’는 서술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4천 명의 청군이 한양에 주둔하며 민

                       폐를 끼친 기억은 백성들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고종대왕은 이후 지속적으로 청
                       군 철수를 요청하였고, 어렵게 쫓아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친청 세력이자 기득권 관료

                      였던 민영휘와 원세개 등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고종대왕을 협박하여 옥새를 강제

                       로 탈취하고 청군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는 고종대왕의 자발적 결정이 아니라,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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