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4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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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빼앗긴 채 강제로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를 ‘강취’라 부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고종이 외세의 군대를 불러 자국민을 학살했다”는
            프레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구조적인 오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동학에 대한 인

            식 역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외침

              동학군은 우금치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당시로선 신형 무기인 게틀링건이라
            는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 앞에서 수많은 동학군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대왕의 명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싸운 자들이

            었기 때문입니다. 체포된 전봉준 장군은 일본공사관에서의 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왜구가 국왕을 욕보였으니, 마땅히 목숨을 걸고 의(義)로 싸우기로 하였소이다.”




              이 말씀 한마디가 전봉준 장군과 동학군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반란군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임금을 위한 의로운 군대, 진정한 의군이었습

            니다.



            평민 선비들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를 넘어

              1897년 고종황제께서 대한(‘국호를 대한으로 한다’)을 선포하실 때, 칭제상소를 올린 이
            들은 대부분 지방의 평민 선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동

            학 접주로서 공동체를 조직하고, 조정에 직접 상소를 올리는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기득권 사대부들이 개혁을 거부하고 외세와 결탁하던 시기, 동학은 새로운 국가 체제,
            새로운 문명 질서를 국민(백성의 나라)의 언어로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민 의군’

            의 실체였습니다. 그들은 무기가 아닌 사상과 조직, 행동으로 나라를 일으킨 보이지 않
            는 주권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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