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4 - 대한사랑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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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논문
한국과 중국사서의 부여 기록에 나타난 부여 인식비교
송옥진, 『고조선연구』, 2014.8
정리. 송옥진 기자
우리 역사에서 부여(B.C.2세기~494년)는 고 교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 사료로는 『삼
구려 주몽이 부여에서 왔다는 것과 백제의 전 국유사』, 『조선왕종실록』, 『지봉유설』, 『동사』,
신이라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해동역사』 및 『북부여기』에서 언급된 부여 관
다. 부여는 발해사와 더불어 한국사의 주류에 련 기록을 살펴보고 있으며, 중국측 기록으로
서 벗어난 변방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는데, 그 는 『사기』와 『삼국지』, 『통전』을 중점적으로 검
이유는 부여의 입장에서 남겨진 사서가 현존하 토하고자 한다.
지 않고 고구려, 백제, 신라만을 정통사로 인정 한국 기록 속에 나타난 부여 관련 기록에서
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영향이 컸으리 는 부여를 단순한 변방 국가로 보지 않고 고구
라 본다. 또한 부여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려와 백제의 기원 국가로 인식하며 민족적 정통
이유 중에는 부여의 한자식 표기가 ‘夫餘’와 ’ 성과 계통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扶餘’ 두 가지가 혼용된 점을 들 수 있다. 중국 는 북부여와 동부여 모두 천제의 자손에서 유
사서에서도 『사기』 등 초기 기록에서는 ‘夫餘’ 래했다고 기록,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와 백
를, 『삼국지』부터는 두 한자가 혼용되었다. 『삼 제의 건국자들이 부여 왕족의 후손임을 명시하
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扶餘’로 표기되어 고 있다. 특히 호태왕비문에서는 고구려 시조
있고 호태왕비에는 ‘夫餘’로 쓰여졌다. 부여 당 추모왕이 북부여 출신이며, 하늘의 아들이자
대인들이 남긴 것은 아니지만 부여 출자의식을 하백의 딸에게서 태어난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
가지고 있는 고구려가 남긴 호태왕비에는 ‘北夫 한 기록은 부여를 단순한 역사적 배경으로 보
餘’, ‘東夫餘’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 는 것이 아니라, 한국 고대 국가의 뿌리로서 민
을 때 부여인 스스로는 ‘夫餘‘로 표기하였을 가 족적 연속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의
능성이 높다 하겠다. 도를 드러낸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이 논문은 한국측 사서와 중국측 사서에서 인식은 지속되어 『지봉유설』, 『동사』, 『해동역
나타난 부여기록을 통하여 한국과 중국이 각 사』 등에서 부여를 단군조선의 후예로 파악하
각 부여, 부여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비 거나 고구려와 백제를 낳은 중심 국가로 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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