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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문 병신년조 기사 초입부의 올바른 해석 (소위 신묘년조 비문 해석) (전치문설은 개솔)
1. 일제가 본 광개토대왕릉 병신년조 문장의 초입부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년 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56-163쪽에 의해 入貢于가 渡海破로 변조되었다고 보았다. (날조된 글자의 글씨체가 다르고 글자의 위치도 다르다)
- 계연수가 1898년 탁본한 내용을 토대로 이유립이 복원한 이유립본에 근거하여 聯侵으로 보았다. (윤창열,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整合性」 『세계환단학회지』, 2018. 66)
일제는 당시 일본 내에 유행하던 유사역사학인 야마토임나설을 조선침략에 이용하려고 하였는데 야마토임나설이 희망사항임을 알려주는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자 이를 조작하였다. 우선 조공했다는 것을 격파했다로 변조하였다. 즉 入貢于를 渡海破로 변조했다. 聯侵이 있으면 도해파로 변조할 수 없으므로 聯侵을 지웠다. 聯侵만 지우면 의심 사므로, 聯侵을 지우기 위해 聯侵이 있는 곳의 대각선 아래로 다 지웠다.
2. 기존 유사사학계 해석의 모순
일본학계와 왕건군 등 일제·중제유사사학은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들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첫째, 이들 유사사학의 해석은 고구려 천하관에 배치된다. 속민이나 신민을 거느릴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밖에 없다. 왜가 다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표시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고구려의 강성함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에서 불가능한 표현이다. 고구려의 토벌대상으로 나오는 왜에게 臣民을 둘 정도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왜가 실제로 백제와 신라를 다스렸더라도 ‘왜가 포학하게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써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이외의 다른 국가가 신민을 거느리거나 거느리려 하였다고 결자를 보완하거나 자구를 수정하는 어떤 시도도 옳지 않다. 또한 속민과 신민은 같은 의미이고 백제와 신라는 이미 속민이라 규정했으므로 다시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삼았다)’라고 만드는 시도도 옳지 않다.
둘째, 이들 유사사학의 해석은 이어지는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왜가 나쁜 놈의 두목이므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고구려가 왜를 격파한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백제를 격파한 사실이 주가 되고 있다. 왜를 언급할 때는 백제가 왜와 내통한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릉비문의 화자는 왜는 백제의 조종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왜가 침입을 해도 백제가 조종한 것에 분개하고 있다. 화통이나 내통이라 표현한 것은 왜도 백제도 고구려의 아래에 있어야 하므로, 백제가 왜 위에서 왜를 조종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어떻든 왜와 백제의 우열관계 판단에서 백제의 우월한 관계를 명시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제·중제유사사학의 해석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즉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앞 뒤가 어긋나는 문장이 된다. 이들에겐 초등학생 정도의 언어실력도 기대할 수 없다. 초등학생의 독해력만 있다면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도해파는 날조임을 바로 알 수 있음에도 이들은 임나 선생님의 강림을 위해 눈을 감는다.
3. 본고 해석의 정당성
반면에 본고에서와 같이, 도해파를, 김병기가 날조된 글씨체를 서예학으로 분석하여 도출한 入貢于로 대체하고, 이유립본에 의해 결자를 연침으로 보완하면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고 이어지는 내용과도 아무런 모순이 발생하지 않으며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한다. ‘以爲臣民’이라 할 때 신민은 고구려에 충성하며 복종하는 모든 백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선 신라를 의미한다. 병신년조 초입부의 왜는 391년(신묘년)에서 396년(병신년) 사이에 신라를 공격한 왜이므로, 백제 지배 하의 열도 소국을 의미한다. 『삼국사』에 왜가 393년 신라를 침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릉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병신년 문장의 도입부는 396년 백제를 공격하는 정당성을 밝힌다. 371년 고국원왕 전사 이후 고구려는 줄곧 백제를 공격하고 있었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먼저 신라를 굴복시켰다. 2019년 3차원 스캐닝으로 충주고구려비 전면 상단의 글자가 ‘永樂七年歲在丁酉’ 즉 397년으로 판독되었고 비문에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과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는 구절이 있다. 충주고구려비의 내용과 391년 1월 신라로부터 볼모를 받았다는 『삼국사』의 내용을 종합하면, 고구려는 391년 1월 이전 신라를 굴복시켜 실성을 인질로 받았으며, 고구려군을 신라에 주둔시켜 신라의 통제와 백제의 공격에 활용하였고, 397년 이전에 백제 영토였던 충주를 점령하고 신라 왕을 충주로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다. 391년 3월에는 고국양왕이 불교를 숭상하여 복을 구하고 國社를 세우고 宗廟를 보수하라 명하는데, 이 때의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은합이 서봉총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고구려의 제사에 참여한 신라의 사신이 고구려로부터 은합을 하사받은 것을 의미한다. 백제는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에 집중하기 위해 393년 열도백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396년의 韓백제 정벌이 행해졌다. 백제를 공격하는 이유(고국원왕의 전사)를 사실대로 쓰면 천자국의 체면이 없어진다. 그래서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 행위를 문제삼고 있다.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게 된 근본원인이 결국은 고국원왕 전사이므로, 표면상 신라 공격을 언급했으나 이는 고국원왕 전사에 대한 백제의 책임을 묻는 것이 된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태왕은 앞의 잘못은 은혜로이 용서하고”라 하여 고국원왕 전사는 명시하지 않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백제와 신라가 속민이었다는 표현을 고구려측의 과장이라 주장하는데, 고구려는 辰韓(辰國, 辰朝鮮) 영역을 차지한 나라이므로 모든 조선의 나라에 대해 천자국임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라도, 고구려는 조선의 천자국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강단유사사학은 충주고구려비를 자기들이 조사해서 판독한 후에도, 판독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양인호, 고태진, 「충주 고구려비 공동 판독안」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98)』, 2020. 5-8쪽] 이는 판독결과가 그들의 ‘장수왕 한반도남하’라는 소설을 붕괴시키고 신라가 고구려의 속민이라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사실성을 입증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천자국 고구려의 속민인데, 백제가 그러한 고구려 중심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행동)을 하여 충실한 신민인 신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중심의 질서를 확인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한다고 한 것은 고구려인의 사고체계에선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다만 표면상의 명분(신라 구원)과 실제의 이유(고국원왕 전사에 대한 복수)가 다를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글이 쓰여진 역사적 맥락에 대해 무지하고, 오로지 일제·중제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서만 사고하므로,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 과장으로 몰아가려 한다.
‘以六年丙申’의 以는 396년의 백제 정벌이 397년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韓백제 부근은 수렁이 많고 강이 많아 여름에 공격하는 경우 원정군이 홍수나 진창에 의해 애를 먹을 수 있어 광개토대왕은 연말에 공격하여 연초에 완료하였을 것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