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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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탁은 본관이 단양(丹陽)이며 어릴 적부터 영특

                     하여 일찍이 관직에 올랐다. 말년에 우탁은 벼슬
                     길에서 물러난 후 경상도 예안에 은둔하면서 후

                     학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였는데, 당시 원나라
                     를 통해 들어온 새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특히 정이천(程伊川)이 『주역』을 해석
                     한 『역전(易傳)』이 처음 들어 왔을 때 고려 땅에는
                     아는 이가 없었는데, 우탁이 방문을 닫아걸고 연

                     구하기를 달포 만에 터득하여 사람들에게 가르
                     쳐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경사(經史)에만 통달한

                     것이 아니라. 천문, 복서 등에 뛰어나 예측한 일
                     이 맞지 않음이 없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될 만
                     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대학자였다고 한다.
                                                                       우탁 선생 초상화 ⓒ단양 우씨 중앙종친회

                       경북 안동시 소재 안동대학교에 가 보면 특별한 서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대학교 교내에 위치한 ‘역동서원’이다. 우리나라에 「정주학」을 처음 소개한 역동
                     (易東)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서원이다. 1570년(선조 3년)에 퇴계 이황

                     의 발의로 우탁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했다.
                     그 후 1684년(숙종10년)에 임금으로부터 ‘역동’이라는 사액을 받았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복원되었는데, 안동대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대
                     학교 교내에 위치하게 되었다. 퇴계가 얼마나 역동 선생을 흠모했던지 서원의 현
                     판 뿐 아니라 ‘상현사’, ‘광명실’ 등 전각의 현판까지 퇴계 선생이 직접 쓴 친필이

                     라고 하니 선생의 학덕이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서원과 달리 역동서원만의 특이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에 『주역』

                     을 전래했다는 역동의 명성에 걸맞게 ‘역(易)’의 뿌리인 ‘복희팔괘’문양이 서원의
                     광장과 비석에 멋지게 새겨져 있다. (80쪽 역동서원 전경사진 빨간색동그라미 참조).

                       그리고 역동 선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명소가 하나 더 있다. 충북 단양군 대강
                     면에 있는 단양팔경 중의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이다. 사인암이란 이름은 우탁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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