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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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중국 절강대 교수는 “신현은 이기(理氣)와 심성정(心性情)등 논역(論域)에서 주
자학을 계승하고 맹자를 상승(上乘)했다”고 극찬한다.
신현은 ‘고려의 스승’으로 명 왕실의 존경을 받았다. 많은 학자들이 유학에
정통해 공·맹을 비롯한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효도와 우애로 풍속
을 고치고, 충성과 신의로서 백성의 바탕을 삼으며, 인자(仁慈)와 의리로서 세
상을 새롭게 개선하고, 예절과 풍류의 도덕을 학문으로 삼았던 신현의 학통
(性理學)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범세동에게 전해졌다.
범세동 묘소와 유허지 유래
범가는 시조묘소 및 8세손까지의 묘소를 실전(失傳)했다. 한일병탄(1910년)
을 당한 후에 후손들이 유적 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다행히 1918년에 찾았으
나 당시 개인소유로 등재되어 있어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범가의 후손들은
포기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선조의 묘지 되찾기 운동에 경주한 후, 범시균
의 노력으로 1949년 묘소 및 유적지를 재확인했다. 당시의 묘소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어 비석이 땅속으로 파묻혀 버렸고 웅장했다는 상석(床石)이나 기
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무수한 암장묘만 있어 조선 500년 동안 범가의
역경과 고난을 말하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상황이었다. 묘비가 중국에서 수
입한 산돌이어서 훼손된 글의 일부가 살아나 범세동 선생의 묘소가 확인되었
다. 1966년 호남지역의 각 사회 인사 및 유림, 후손 등 약 2000여명이 참석하
여 묘의(墓儀) 행사를 거행했다. 현 국조숭모회 이종일 회장의 노력으로 광주
시 문화재에 지정되었다. 2016년 9월, 이홍범 박사가 호남의병연구원(원장 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복룡사터에 현재의 용호재가
세워져 복애선생에 대한 향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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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애범선생복룡사유허비 ⓒ강인한 용호재 금성범씨 재실 ⓒ강인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