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대한사랑 14호(202502)
P. 80
주역과 역사
중국에서 역(易)을 가져온 우탁(禹倬)
글. 한태일(한역연구소 소장)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白髮)을 막대로 치려하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필자가 학창시절에 배웠던 「탄로가(嘆老歌)」라는 시조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느덧 백발이 된 자신을 보면서 아쉬운 심정을 노래한 시
조로 고려 말 우탁(禹倬,1262~1342년) 선생이 지은 것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전래되
어 온 것 중에서 최고(最古)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우탁 선생은 시조 못지
않게 『주역』에 있어서도 큰 족적을 남긴 역학자이다. 선생의 호가 ‘역동(易東)’이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주역』과 관련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김
석진의 『대산 주역 강의(1)』에 나오는 일화이다.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어느 대신의 집에서 묵고 있을 때, 그 대신
에게 중국에서 가장 보배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신이 내놓은 것
이 바로 『주역』이었다. 우탁 선생이 『주역』을 보니 참으로 심오한 뜻이 들어 있어
그것을 얻고자 했지만, 나라의 국보를 내줄 수 없다고 거절하여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한번 보고 통째로 외웠다고 한다.
얼마 후 선생이 귀국하는 도중에 동쪽으로 서기가 뻗치자 원나라에서는 우탁
을 잡아들여 ‘가져가는 게 없느냐?’고 물으니 ‘아무것도 없고 다만 『주역』을 외워
가기만 한다.’고 답하며 『주역』을 줄줄 외우자, 원나라 관리들이 무릎을 탁치며
‘오역동(吾易東)이라! 우리의 『주역』이 동쪽의 고려로 가는구나!’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우역동(禹易東)이라! 우탁이 『주역』을 중국에서 해
동국 고려로 가지고 왔다.’고 말하였다. 후대에 퇴계 이황이 우탁 선생이 『주역』
을 우리나라에 널리 알리게 된 점을 높이 평가하여 ‘역동선생(易東先生)’으로 호칭
하였다.”
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