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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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합의한 후 스승 신현 생존 시의 일들을 편찬했다. 다섯 차례의 편찬과 네
차례의 재난을 거치면서 원천석 총단(總斷)과 범장 편집으로 재편찬되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화해사전』이다. 원고 마무리단계에서 범장은 치악산 회맹 동
지들에게 회람하는 형식으로 의견을 모아 수권을 저작, 범장과 원천석이 각
각 보존했다. 범세동은 일 년에 두 번씩 치악산에 가서 벗 원천석을 비롯한 회
맹동지들과 함께 단사(檀祀)를 지내고 저작활동을 하였다. 복애는 초지일관의
마음을 갖고 두문동의 비극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성계가 두문동에 불을 지르자 범세동은 불길을 피해 부조현(不朝峴) 언덕
에 올라 불타는 두문동을 바라보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송도 부조현에 오름(登松都不朝峴)
*
백이(伯夷) 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죽음을 맹세한 한마음으로 수양산(首陽山)을 바라면서
홀로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젖어 종일토록 서 있노라니
이 몸, 푸른 하늘에 부끄럼 없네.“
夷何人也我何人矢死一心望首陽
揮淚獨悲終日立身惟無愧彼天蒼
* 백이와 숙제(叔齊): 고죽국(孤竹國)의 두 왕자로 주나라 무왕이 종주국인 은나라 주왕을
치는 것을 반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주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외에 복애가 포은에게 증한 시, 포은이 복애에게 증한 시, 목은이 복애에
게 증한 시 등이 『화동인물총기』에 실려있다.
범세동의 필법
전남대 명예교수 이상식 박사는 논문에서 “범세동은 표절이 강인하고 매
서워 초연하고 굳센 인생을 외롭게 살면서 조선왕조의 핍박과 압력 속에 일
생을 마쳤다. 그러한 조정의 박해와 조상들로부터 전래한 은둔의 정신을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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