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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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충신열전 (2)
충의의 선비는 사람을 기다린 뒤에야 이름이 더욱 드러나고, 충절
이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선조(先祖)의 역사는 후예들이 만드
북 는 것이라면 이제 600여 년의 시공을 넘어서 감춰진 고려 말 역사
와 범세동의 행적을 밝히고자 한다.
복 부 범세동의 생애
애 여 1369(기유, 己酉, 공민왕 19)년 6월 계미시(癸未試)의 문과에 급
범세동(1342~1397) 선생은 고려 말엽 1342년에 태어나
기
범 의 제, 덕녕부윤과 간언대부를 역임했다. 고려 말 당시의 민
중들은 범세동을 ‘복암(伏巖)선생’이라 불렀다.실제 그는
문자 그대로 바위 뒤에 숨어 글을 써야 하는 일생을 살았
세 저 다.
복애의 선계는 중국 낭야 사람이다. 범씨는 도주공 범
동 자, 려로부터 진·한·당· 송을 지나면서 명문가로 많은 문인재
사들을 배출했다. 고려로 귀화한 복애 증조의 생전의 이
의 름은 승조인데, 송말 원초에 예부시랑(문교부차관)의 관직
에 있다가 원 진왕(晉王) 감마랄(甘麻刺)의 딸인 계국대장공
생 주(?~1315)가 망국의 상이 있다 하여 고려로 출가하게 되
애 니, 시종랑(侍從郞)으로 배신(陪臣)들과 함께 1298년 고려로
입국했다. 범세동 선생의 조부는 범유수인데, 충선왕 때
와 에 문하시랑으로서 금성군에 봉하였고, 아버지는 범후춘
이다. 그는 포은 정몽주와 아주 가까워 《포은 80당의록
사 (八十黨議錄)》에 들어갔으며, 아들 범세동의 교육을 포은에
게 부탁하기도 했다. 범세동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
상 로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갈 때 천명을 알고 불사이군(不
事二君)과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절의
충신 71명과 함께 두문동에 몸을 숨겨 충절을 지켰으며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겼다.
글. 범기철
(호남의병연구원장,25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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