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대한사랑 14호(20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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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 72현의 역사
이성계는 송도 경덕궁(敬德宮)에서 과거를 통해 그들을 감복시키려 하였으
나, 두문동에 숨어 산 72인 모두는 관복(冠服)을 벗고 대신 갈대로 만들어진
삿갓을 쓴 뒤, 채찍을 잡고 나오면서 “우리는 장차 행상을 하리라” 말하며 한
사람도 응시를 하지 않아 크게 노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모두 불태워 버
렸다 한다. 후인들이 시를 지었는데, “삶을 잊으니 진나라의 현신 개자추(介子
推)의 한이요, 목숨을 끊으니 제(齊)의 충신 왕촉의 원한이네.”라며 탄식했다.
관을 걸어놓은 곳을 괘관현(掛冠峴)이라 하고, 넘어간 재 이름을 부조현(不朝峴)
이라 불렀다. 1740년 영조가 송도를 방문할 때 왕명으로 ‘고려충신부조현(高
麗忠臣不朝峴)’이라는 일곱 글자를 고개에 새기게 하였다. 그 후 1751(신미, 辛未)
년 9월에 영조가 두문동을 재차 방문해 다시 제단을 쌓아 72현을 제사 지내
고 “고려의 충신들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어필의 비문을 새긴 비석을 그
곳에 새겨 충절을 표창하였다. 그 후, 1783년 정조가 왕명으로 개성과 성균
관에 표절사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아픔의 세월은 도도히 흘러 고려 충신
들은 조선조 16명의 왕이 지난 350여 년 후에 명예 회복이 이루어져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치악산의 회맹 충신들
범세동을 비롯한 절의충신들은 매년 봄가을에 원주 원천석 집에 모여 치악
산 정상에 단을 만들고 열성조(列聖祖: 동방의 기틀을 마련하고 나라를 연 임금인 단군, 기
자(箕子), 고려 태조 왕건, 공민왕, 우왕, 창왕 등을 지칭)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성계 일파
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당시의 권력자인 신돈의 핏줄이라고 주장
했다. 그들은 환부역성(換夫易姓)의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켜 공양왕을 옹립하였
고, 여흥(驪興, 여주)왕 부자인 우왕과 창왕은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우·창 비왕설이 굳어졌다. 당시 우왕 비왕설(우왕은 공
민왕비인 순정왕후의 소생임)에 대한 부정은 곧 조선 개국에 대한 반대의 뜻을 나타
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절의충신들이 운곡의 집에 모여 제사
를 지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범세동과 원천석은, 이긴 자들이 기록하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역사가 곡해
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숨겨진 역사를 밝혀 바른 역사를 써서 후세에 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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