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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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부사가 적중에 내던진 목패는 단호
함을 넘어 비장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3개 대
(隊)로 나누어 한 대는 황령산 기슭부터, 한 대
는 서편 대로로부터, 또 한 대는 취병장(聚兵場)
으로부터 바로 남문으로 향하여 날이 저물기
전에 세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14일 밤은
적의 포위 속에 살기가 등등한 가운데 지새웠
다. 동래읍성에 대한 항복 권유를 포기한 왜군
은 15일,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군신의 의리로 택한 죽음
동·서·남 세 방면에서 조총을 난사하면서 성
을 넘으려는 왜군에 맞서 조선군은 사력을 다 동래부순절도 보물 제392호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의 항전 내
용을 그린 조선 후기의 기록화로 갑옷 위에 분홍색 관복을 갖추고
해 응전하였다. 이에 적은 뒷산인 동북쪽 산의 임금에게 마지막 하직의 절을 하는 송상현 부사의 모습이 보인다.
©육군군사박물관
경사진 성벽을 파괴하고 그곳으로 성난 파도
와 같이 침입해 들어왔다. 순식간에 성내는 대
혼란 속에서 한동안 아비규환의 대접전이 벌어
졌다. 무기를 갖지 못한 성민들은 혹은 도수로
적에 부딪치고, 혹은 막대기를 휘두르며, 혹은
괭이, 낫, 도끼 등 손에 잡히는 대로 가지고 싸
웠으며, 심지어는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거두
어 적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대세는 시시각각 불리해졌고 마침내 일본군에
게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마지막 순간, 송상현 부
사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부
모님께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비늘 갑옷 그동안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으로 그 존재만 알고 있었던
비늘갑옷 1벌이 발굴되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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