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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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의학을 배웠는데, 한의학에 입문한 지 2년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도 주변 사람
들의 웬만한 병들은 다 고쳐주었다고 한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부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자와 동업하여 진료를 시작하
였다. 부산 피난 시절에 동양의학전문학원에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으며, 1953년도
제2회 한의사국가고시에 응시하여 면허를 취득하였고, 정식으로 부산에서 인계(仁
溪) 한의원을 개원하였다.
그 해 『역학원론(易學原論)』의 저자인 자신의 유일한 스승 삼화(三和) 한장경(韓長庚,
1896~1967)선생을 만나 『주역』을 공부하게 된다. 『우주변화의 원리』 책에서도 그때
의 솔직한 심정을 “아아 하늘이 이제야 나에게 양사(良師)를 보내는가 보다.”라고 감
동했을 정도였다. 그 후 1956년 서울로 올라와 인사동 사거리에 ‘한동석 한의원’을
개원하였다.
이때부터 계룡산 국사봉을 자주 출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역』과 『정역』을 공부
하였다. 계룡산 국사봉은 일찍이 김일부 선생이 『정역』을 완성했던 정역파(正易派)들
의 성지였다. 1950년대 중반에 충남대학교 총장을 지낸 『정역』의 대가, 이정호(李正
浩) 박사를 필두로 화엄경을 국역한 탄허(呑虛) 스님, 정역학자인 권영원(權寧遠) 등이
모여 『정역』을 공부하던 소위 ‘계룡산학파’가 형성되었다.
한동석은 5번이나 결혼하는 등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였으나, 치병 능력은 해외에
까지 알려져 하루는 서독에 사는 교포가 병원에 가도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다며
증세를 적은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한동석은 환자의 사주(四柱)를 알려 달라는 답
장을 띄워 환자의 사주에 맞추어 처방전과 첩약을 지어 보내줬더니 씻은 듯이 나았
다고 한다.
선생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주위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무섭게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항상 무언가를 외워 길을 걸어가면서까지 외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
었다고 한다. 그가 암송한 것은 중국 전통 한의서인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운기편
(運氣編)」이었다. 후일에 그가 말하길,
“3천 독을 하고 나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3천 독을 했는데도 전혀 감이 오
질 않자, 6천 독을 하고 나니 약간 뭔가 있는 것 같아서, 다시 3천 독을 더하여 9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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