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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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 이곳 부조현(조정에 나가지 않는 마을)의 유래 우리 민족 고유의 덕목을 배양하고 민족혼을
를 듣고 “고려 충신의 명성이 지금도 남아 있으 고취시키는 공간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니, 특별히 그 동에 (비를) 세워 그 절개를 표창 이들을 기리는 사자성어도 있는데 그것이 바
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는 14자를 내려 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두문불출이란 본래
두문동 동구에 비를 세워주었다.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은거하
그 뒤 임선미, 조의생 등의 가승(家乘)을 통하 며 관직에 나가지 않거나 사회의 일을 하지 아
여 이 고사가 알려져 정조에 의해 1783년(정조 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국어(國語),
7)에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우고 진서(晉書), 사기(史記) 등에서 두루 쓰던 말이었
사액하게 된 것이다. 으나 고려 말기의 충신들과 두문동 72현의 충
절을 대변하는 사자성어로서 확장된 것이다.
두문동서원과 민족적 자긍심
1934년엔 개성에 두문동 비각과 표절사를 임선미의 순절과 사당 호계사
기반으로 두문동서원이 세워졌다. 이 서원은 임선미가 순절했을 때의 나이는 33세다. 정
임선미의 후손인 임하영(林河永)이 주도하여 창 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를 스승으로 섬겼다는
건한 것으로, 고려 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 대목이 이야기로 전해지며 전북 순창 호계마
를 위해 순절한 임선미를 비롯한 72인과 정몽 을엔 임선미의 비석과 위패가 모셔진 사당 호
주, 이색 등 절의를 지킨 고려 말 충신 119위를 계사(虎溪祠),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일심리에
모셨다.
1934년이라는 시점은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 순창임씨 종친들이 순창 호계사에서 제향 하는 모습 ©유튜브채널 임재호 호계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되새길
필요가 절실했던 때였다. 그런 가운데 두문동
서원의 설립은 고려 말 충신들의 절개와 충절
을 민족적 정신으로 부활시키고자 했던 상징적
행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를 실천하며
순절한 임선미와 72인 같은 충신들은 당시 혼
란한 시대 속에서도 정의와 신념의 가치를 끝
까지 지켰다. 두문동서원은 이러한 분들의 정
신적 유산을 후대에 전하고, 충절과 의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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