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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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세속을 바로잡는 데 힘썼다고 알려져 있으 동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임선미와
며 성석린(成石璘) · 박상충(朴尙衷) 등 신진 사대부 조의생은 앞장서 두문동의 길목인 부조현(不朝
들과도 가까이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峴)을 넘어 들어가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나오
조선 영조 1751년 10월 21일에 두문동 72 지 않았는데, 태조 이성계는 이들을 불러 설득
현을 기리는 첫 제사를 지낼 때 낭독했던 사제 하기 위해 부조현이 건너다보이는 경덕궁(敬德
문(賜祭文)에는 “오직 조씨(曺氏), 임씨(林氏), 맹씨 宮)에서 과거를 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
(孟氏) 성을 가진, 전하는 사람은 이 셋뿐이고 나 었다.
머지는 찾아볼 기록이 없네” 라고 했는데, 이들 이에 이성계는 재위 6년(1397년) 되는 해 두
셋을 ‘두문동 삼절三節’이라 이른다. 이때 임씨 문동에 불을 놓았는데, 이들이 불을 피해 밖으
는 임선미이고 조씨는 조의생(曺義生)이다. 맹씨 로 뛰쳐나오면 조선의 관리로 벼슬을 주고 함
는 당시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고 훗날 맹호 께 새로운 세상을 도모하려는 의도였다. 하지
성(孟好誠)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만 그 중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나오지 않은 이
두문동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에 반대 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임선미와 조의생 그리
한 고려 유신이 모여 살던 곳으로, 지금의 북한 고 맹호성이다.
지역인 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두문 1740년(영조 16)에 영조가 개성을 행행(行幸)
두문동 비각
1751년 영조가
세운 충절비
1782년 간행 『송도지』「奎 4983」에 수록된 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
개성부(開城府) 일대를 그린 것으로 개성부 서쪽에 두문동이 있다.
©야촌 이재훈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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