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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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과 지방 유림의 기록에 남겨졌는데 대표적으
임선미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임중연을 시 로 『두문동 72현록』이 있다. 두문동 72인의 명
조로 삼아 순창임씨를 표방했으나 조선 건국 단에 임선미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으며, 고려
에 반대하며 목숨까지 내던진 선조로 인해 가 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기 속에서도
문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아 간신히 명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대의를 위해 삶을 바쳤
맥만 잇는 정도였다. 던 인물로 묘사한다.
임선미의 후손이라는 게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인데 이후 철종시대 종중의 합의로 순창의 오늘날, 두문동 선비의 정신을 되새기며
관향을 가진 일부는 평택으로 개칭되었는데, 영조나 정조와 같은 조선의 왕들이 전 왕조
원시조에 맞춰 평택 본관을 쓰면서 살게 된 것 에 충성했던 선비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으로 최근까지도 대다수가 평택 임씨로 호적을 세운 것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을
하고 살아서 인구조사 통계에 잡힌 순창임씨 것이다. 이는 단순히 두문동 72인을 표창하고
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세계성씨연맹 제공) 기념하는 것을 넘어, 순절한 이들의 충절을 기
리는 동시에 고려 왕조의 정통성과 가치를 포
두문동 72현의 기록과 명단 형성 과정 용하려는 깊은 의도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두문동 72현의 이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 이러한 행보는 나라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근
기의 사료에 흩어져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 본을 더욱 굳건히 하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
라 점진적으로 명단이 구체화된다. 키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과정은 역사적 맥락과 오늘날은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며 삶의 질
조선 초기 성리학적 충절의 강조라는 흐름 속 이 크게 향상되었지만, 동시에 개인주의와 이
에서 이루어졌는데, 처음엔 조선 초기 『조선왕 기주의가 점점 팽배해지는 시대이다. 정치, 문
조실록』에서 두문동 72현의 충절이 언급된다. 화, 경제적으로 극단이 심화되는 이 시대에, 영
두문동 은거 사건과 관련된 기본 배경을 설명 조와 정조의 포용정신처럼 보편의 가치로서 한
하며, 일부 인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또 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역사의 교훈가치와 상
1478년 시문 선집 『동문선(東文選)』에서는 고려 생의 정신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더불
말기의 충신들을 기리는 작품에 두문동 72현 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의리와 충절을 위해
의 이름이 포함된 경우가 있다. 목숨을 바쳤던 두문동 선비들의 기개와 정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두문동 72현의 충절이 을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보는 시간이 필요하
다시 재조명되며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문집 지 않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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