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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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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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첫 격전지, 부산

              1592년 4월 13일 오후, 왜의 조선 침략군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약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18,700명의 왜군이 700여 척의 배에 나눠타고                   길을 내놓아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들이 부산진을 포
            위한 것은 이튿날 아침 6시, 부산진 첨사 정발                    당시 부산 해안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

            (鄭撥, 1553~1592)은 병사 천여 명 및 백성들과 함            좌수사 박홍(朴泓)과 동래를 관할하고 있던 경
            께 장렬히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임진왜란                      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많은 적을 감당할 수 없

            이후 일본에서는 “부산에서 정발 장군이 검은                     다며 줄행랑을 쳤다. 동래읍성에 남아 있는 사

            옷을 입고 가장 격렬하게 일본에 저항했다.”라                    람은 송상현(宋象賢, 1551~1592) 부사와 동래읍성
            고 평가했다. 그만큼 부산진 전투는 아주 장렬                    병사들, 그리고 칼과 창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일

            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반 백성들뿐이었고 앞선 부산진 전투의 참혹
              4월 14일,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구는 그날                   한 패배 소식이 들려왔다.

            오후 동래읍성으로 와서 진을 쳤다. 먼저 본격

            적인 공격에 앞서 아래와 같이 쓴 목패를 남문                     “死易假道難”
            밖에 세워 동래 읍성 군민들의 항복을 촉구하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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