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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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하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중국인은 인                     이는 구본신참론적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한

            력거를 타고 꾸물대는데 “한국인은 쌩쌩 달리                     국과, 배알도 쓸개도 없이 서양을 맹목적으로
            는 전차를 탄다”고 감탄했다. 1906년 헐버트                   모방한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질적’ 문화격차

            (H. Hulbert)는 “20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여행            였다. 비숍 여사도 “서울은 한국식으로 건설되

            자는 물질적 변화들에 대해 깜짝 놀라게 될 것                    고 있는 것이지, 유럽식으로 건설되고 있는 것
            이다”라고 평가했고, 메켄지(Fr. McKenzie) 기자는            이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1894-1904년 사이에 단행된 대개혁 덕택에                   또 홈즈(B. Holms) 미국 시카고대 교수도 다시
            한국이 깜짝 놀랄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했                     확인한다. “이채연은 버섯처럼 볼록 솟은 오두

            다.                                           막과 판잣집으로 가득했던 넓은 거리를 깨끗이

              서울의 이러한 근대적 개조는 서양의 모조                     정비했다. 그는 통행로를 포장하고 도로의 보
            품(‘짝퉁’)이 아니라 한국 특유의 독창적 패치워                  수와 유지를 위한 법령을 제정·시행했다. 서울

            크였다. 겐테 박사는 1901년 당시 서울 풍경                   은 이전에 북경보다 열악했지만, 지금은 동양
            을 “진짜 철두철미 본연의 모습, 말하자면 중                    의 어느 전통 도시보다 좋다.”고 했다. 그리고

            국도, 일본도, 아니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홈즈는 “동서가 혼성된 이 천년고도 한성의 풍

            떠오르게 하지 않는 한국 본연의 모습”으로 묘                    경은 정말로 눈에 튀고 호기심을 일으킨다”고
            사하고, “서울은 실로 서양의 발명품들을 대규                    덧붙였다.

            모의 수도교통을 용이하게 하는 데 활용하는                       아관망명 1년 뒤인 1897년 당시에 이미 한

            면에서 동양의 다른 모든 대도시를 앞질렀다”                     국 재정상태는 크게 개선되고 있었다. 비숍은
            고 탄복했다. 그는 “서울은 본모습이 점점 부                    “1897년 4월에 회계연도를 마감했을 때, 탁지

            서져 내리는 북경이나, 본모습이 희석되어 특                     부는 150만 달러를 보유했으며 300만 달러의

            징이 없어진 동경보다 진짜 비교할 수 없이 훨                    일본 차관 가운데 100만 달러를 갚았다.”고 보
            씬 더 매력적이었다. 서울의 거리에서 보는 삶                    고한다. 심지어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

            의 색깔들은 북경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그 형                   助)가 1900년 2월 19일 본국에 보낸 비밀 보고
            상은 동경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이 전체 위에                   에서 “한국은 단순한 상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항상 새롭게 놀라운 사실을 매 순간 다시 회상                    들어서는 데 이르러 한두 동양국가들과의 관계

            하게 하는 말할 수 없는 이국적인 어떤 것이 있                   로부터 나아가 세계적 경쟁 영역에 임하고 있
            었다.”고 했다. 서구 지식인의 눈에 비친 당시                   다.”고 하여 이를 공식 확인해준다. 이어서 하

            “철두철미 본연의 모습”을 한 서울과 “본모습                    야시는 1904년 10월 29일 비밀 보고에서 “한
            이 희석되어 특징이 없어진” 동경의 이러한 차                    국의 무역은 해마다 다소 소장(消長)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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