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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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의 추세가 현저하다.”고 더욱 확실한 평가 추월하고 포르투갈(1915년 $1228)에 육박했다.
를 내린다. 1915년의 이 성과는 순전히 대한제국 시기 고
정부의 식산 흥업 정책으로 수백 개의 근대 속 성장의 ‘여세’로 달성된 것이다. 일제는 을
적 기업이 일어났고, 이 기업들은 대부분 일제 사늑약 이후 1919년 3·1운동 이후까지 15년간
시대를 관통해 ‘민족 기업’으로 살아남아 해방 단돈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수탈에만 몰두했
후 한국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가령 황립 다. 이 고속 성장 추세가 계속되었더라면 한국
(皇立) 대한천일은행(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 은 1927년경 일본을 앞지를 판이었다.(참조: 황
은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이고, 조선의 궁중 태연 외, 일제종족주의 )
비방을 상품화한 동아제약의 ‘활명수’는 오늘
날 ‘까스명수’의 전신이다. 군사대국으로서의 대한제국
경제가 고속성장하면서 정부예산과 무역 몰지각한 자들은 대한제국이 국왕을 지킬
도 급팽창했다. 1904년 정부예산(1421만 원)은 100명의 군대도 기르지 못했다고 조롱하는데,
1896년(481만 원)보다 3배 급증했고, 1904년 무 대한제국은 저 고속성장을 바탕으로 1900년
역 총량은 1901년(1800만 엔)의 곱절, 1910년 전후 이미 아시아 제2위의 군사 강국으로 올라
(6000만 엔)은 1901년의 3배가 되었다. 교역상대 서 있었다. 고종은 ‘3만 신식 군대’를 길러 아시
국은 중국·일본·대만·러시아·영국·미국으로 다 아의 군사 강국을 건설한 것이다. 1900년대 아
변화되었다. 시아에서 일본 외에 3만 신식 군대를 가진 나
국민소득도 급증했다. 매디슨(Angus Maddison) 라는 없었다. 청국의 신식 군대는 청일전쟁에
의 OECD통계에 의하면 조선은 1820년 1인 서 왜군에게 거의 궤멸하고, 원세개 휘하의 잔
당 GDP가 600달러로서 중국과 공동순위였으 여 청군은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만주에 진출
나, 1870년 604달러로 반등하여 1870년 이전 한 러시아군에게 진멸되어 ‘청비(淸匪, 청나라 도
에 저점을 통과하고 1911년에는 815달러에 달 적)’화 되어 사라진 상태였다.
했다. 그리고 한국경제의 고속 성장은 일제병 고종은 1897년 2월 겨우 1000명의 신식
탄 이후에도 관성에 따라 계속되었다. 1915년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덕수궁)으로 환어(還御)했
대한제국(이때도 한국민은 자기 나라를 대한제국이라 생 으나, 신식 병사들을 교관과 조교로 활용해 3
각했음)의 1인당 국민소득($1048)은 일제의 ‘개발 만 신식 군대를 길러냈다. 그리고 신식병기를
투자 없는 일방적 수탈’ 속에서도 필리핀과 인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각국에서
니를 앞질러 일본($1430) 다음의 아시아 2위의 수입하거나 자체 제작해서 군대를 무장시켰
경제 대국으로 도약하여 그리스(1916년 $972)를 다. 무기의 자체 제작은 1901년 4월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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