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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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씩 (...) 횡행함에 도저히 소부대로는 토벌키 내 진공 투쟁을 벌여 교전회수는 거의 불변이
어렵다”고 보도하고 있다. 었다. 1911년까지 국민군의 총 전사자 수는 동
‘대한독립의군’의 전위부대는 1907년 12월 학군 사망자 수와 비슷한 것으로 추산된다. 동
초 서울 진공 계획을 수립하고 1908년 1월부 학군 사망자는 전사자(3만)와 전상사망자(2만)
터 허위(許蔿)의 지휘 하에 전초전을 개시했다. 를 합해 총 5만 명이었고, 민간피살자 포함 총
왜군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힘들만큼 계속 밀렸 사망자는 20-30여만 명이었다.(전사자 일제 통계
다. 통감부는 왜군이 밀리자, 본국에 원병을 요 는 1만7840명.)
청하여 왜군·왜경을 4만여 명으로 늘리고 국민
군의 공세에 강력 대처했다.
또한 거의(擧義)한 지 2년이 지나자, 국민군은 고종의 마지막 구국 투쟁: 이토 처단
실탄이 고갈되고 무기가 다 망가져갔다. 이에
국민군은 1909년부터 무기를 구하러 만주로 고종은 1907년 7월 태황제로 퇴위당한 뒤
북상(北上)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 틈을 타고 외부와 자유로이 소통할 수 없는 ‘궁금숙청(宮
비밀리에 1910년 8월 29일 전격으로 대한제국 禁肅淸)’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伊
을 병탄했다. 그래도 1915년까지 국내에서 국
민군의 항전은 계속되었고, 공식 명칭이 ‘대한
황궁우 1925년 버튼 홈스(B. Holms) 촬영
독립의군’이었던 국민군 부대들은 1920년대에
모두 ‘의(義)’자가 빠진 ‘대한독립군’으로 전환
되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의 제2차 침략
전쟁인 갑진왜란에 대항한 국민전쟁은 1907
년, 1908년, 1909년으로 해가 갈수록 부단히
가열되다가 만주·연해주·미주·중국 등 국외 독
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08년 국내 국민군
총병력 수는 약 8만3000명, 1909년 3만9000
명, 총 교전회수는 1908년 1976회, 1909년은
1738회로서 해마다 엇비슷했다. 1909년에는
많은 국민군이 만주로 넘어갔기 때문에 반감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만주의 국민군이 계속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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