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대한사랑_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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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약속하며 러시아군의 국내 진공을 수차 은 합세하여 ‘국민군’을 이루고 전국적으로 ‘국
촉구했다. 그러나 35만 명의 러시아군은 어리 민전쟁’을 벌였다. 1904년 2월 6일 왜군의 재
석게도 국내 진공을 포기했고, 만주와 연해주 침 이래 3여 년간 계속 해산당한 3만 ‘국군’의
로 양분되어 패전하고 말았다. 상당수가 도처에서 ‘민군’과 결합하여 신식전
고종은 러군이 국내진공을 거부하고 패전하 력을 갖춘 ‘국군+민군’으로서의 ‘국민군’이 탄
자 ‘중립’ 명령으로 종전(終戰)까지 국군의 전력 생한 것이다. 이 국민군으로 “원수부 13도 창
(戰力)을 보존하고 있다가 결전을 치를 계획으 의대진(倡義隊陣)”이 결성되었다. 1910년까지 의
로 차근차근 ‘국민전쟁’을 준비했다. 1905년 병장 430명 가운데 국군 출신 의병장은 무려
11월 17일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고종은 전국 27%(115명)에 달했다.
에 거의(擧義)밀지를 발령하여 ‘국민전쟁’에 돌 ‘국민군’의 전투력은 왜군을 능가했고, 국민
입했다. 고종의 거의밀지에 따라 1906년 말부 군은 전투마다 연전연승했다. <대한매일신보
터 430명의 의병장이 전국적으로 거의(擧義)했 > 1907년 8월 30일자 기사를 보면, “강원일도
다. 동시에 고종은 1906년 12월 1일 <대한매 와 충북에는 의병이 없는 읍(邑)이 없고 (...) 혹
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했다. 고봉(高峯), 일심곡(一深谷)과 혹 안변(岸邊)으로 각
이에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 밀사 사 처 파수하는데 일병(日兵)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
건을 빌미로 7월 19일 고종을 폐위시켰다. 그 고”, “일병을 살해한 수효가 1000명 이상이오,
리고 8월 1일 중앙과 지방의 잔존 7000여 명 연사포 2문과 기관포 6문과 양총 1200-1300
의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과 군마 48두와 탄환 9태를 다수히 탈취했
‘국민전쟁’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 고, (...) 일병은 (...) 세가 대적할 수 없다”고 보도
해산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는 무장봉기를 하고 있다. 이는 검열로 인한 ‘축소보도’다. 모
일으켰다.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1일 든 수치는 두세 곱절로 부풀려 읽어야 한다.
아침 군대해산에 항의해 자결하자 1연대 1대대 이강년·허위·이인영 등 전국 각지의 애국적
와 2연대 1대대가 1일 8시경 봉기하여 3일간 인물에게 무수히 내려진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의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실탄 고 1907년 11월 26-27일 결성된 ‘대한독립의군
갈로 분패하고 말았다.(전사 68명, 부상 100명, 포로 (大韓獨立義軍, 고종이 하사한 원래의 명칭), 즉 ‘원수부
516명, 탈출 400명) 원주·강화 진위대도 서울 무장 13도 창의대진’은 서울을 제외한 전 지역을 ‘해
봉기 소식을 듣고 봉기해서 국민전쟁의 일익이 방구’로 탈환했다. <대한매일신보>의 1908년
되었다. 5월 6일자 기사는 “일본인은 일보라도 내지에
해산 ‘국군’과 산포수를 비롯한 의병 ‘민군’ 들지 못하며”, “고양·양주 산중에 의병이 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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