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대한사랑_4월호
P. 10

되었다.                                         대해산 후 의병장이 되어 ‘국민전쟁’을 지휘했

              대한제국 신식군대의 ‘실제’ 총병력은 4-5만                  고, 1910년 이후엔 ‘민족간성’으로서 독립군과
            명에 달했다. 1900년 이후 고종은 인조 때 창                  광복군을 이끌었다. 특히 1920년대 독립전쟁

            설된 착호갑사(捉虎甲士) 이래 존속해 온 2만여                   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이 주도했다.

            명의 전국 산포수들을 신식총기로 무장시켰기                      신흥무관학교·밀산무관학교 등 만주 소재 무
            때문이다.                                        관학교의 교관들도 거의 다 대한제국 무관학

              고종은 신식군대의 창설과 유지에 국력의 절                    교 출신이었다. 1911년부터 신흥무관학교에서
            반을 쏟아 부었다. 1901년 국방예산은 1896년                 길러낸 장교만 세어도 8000여 명에 달한다.

            (약 103만 원) 대비 3.6배, 1903년은 5.2배(535만          고종은 4-5만 신식병력 배경으로 울릉도·독

            원)로 증가했다. 1901년부터 국방비는 국가예                   도·간도를 만국공법에 입각하여 대한제국의 영
            산의 절반(1901년 41%, 1902년 38.3%, 1903년 39.5%)   토로 확립했다. 고종은 1900년 칙령으로 울릉

            에 육박했다. 대한제국은 경제의 초고속 성장                     도와 독도를 영토로 확보하고, 1903년 8월에는
            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도를 행정체제에 편입해 영토로 확립하고, 간

              또 고종은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해 민족간성                     도관리사 이범윤을 그곳에 파견해 백성을 보호·

            을 육성했다. 일본 교관이 1894년 7월부터 훈                  관리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 함북진위대와 이
            련시킨 200여명의 ‘교도중대’는 친일괴뢰군대                    범윤의 ‘충의대(忠義隊, 두만강 연안)‘·‘사포대(私砲隊,

            로서 동학군을 학살했고, 교도중대에서 개편                      북간도)‘는 거듭 침입한 ‘청비(淸匪)’를 연전연승으

            된 친일 훈련대·친위대는 민비 시해에 가담했                     로 물리쳐 간도를 지켜냈다. 고종은 신식군대에
            다. 아관망명 후 러시아 교관들이 기른 장교들                    의지해 ‘4000리 강역’을 확보함으로써 광개토

            도 민족정기가 취약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대왕 이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선포한 지 달포 뒤 1897년 11월 29일 군부협
            판 주석면(朱錫冕) 주청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

            학교를 창설했다. 이 무관학교는 1898년 7월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1일 개교해서 1904년까지 495명 장교를 배출

            했다. 그리고 고종은 무관 우대 정책을 실시했                    갑진왜란(1904.2.6)과 갑진왜변(4.14)

            다. 가령 정장(正將, 대장)에게는 정·종 1품, 4996              갑오왜란(1894)을 일으킨 지 9년 8개월 만
            원을 보장해서 의정(총리)과 대등한 대우를 했                    인 1904년(갑진년) 2월 6일 저녁 왜군은 대한제

            고 그 아래 장교들도 비례해서 우대했다.                       국을 재침(再侵)하는 ‘갑진왜란’을 도발했다. 일
              대한제국이 기른 민족 장교들은 1907년 군                   제는 대한제국의 ‘전시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10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