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7 -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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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도 창의군에 합류했다면 의병 독립 전쟁의 양상은 바뀌었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독립운동 일가인 신돌석 집안

                        신돌석은 1878년 무인년 음력 11월 3일에 경상도 영해도호부 남면 복평리 정신곡,
                       오늘날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동(道谷洞)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신석주[申錫柱: 족보명 절주(浙柱)]이고, 모친은 분성(盆城) 김 씨이다. 두 명의 누나와

                       열 살 어린 동생 신우경[申友慶, 본명은 신태범(申泰範), 1888~1962]이 있었다. 큰누나는 이웃에
                       사는 박수찬(朴壽燦)과 혼인했는데, 박수찬은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 의진에 참가했다.

                        부인 한재여(韓在汝, 1878~1952) 여사는 동갑으로 슬하에 외아들 만이(萬伊, 혹은 경팔)가
                       있었는데, 1908년에 사망했다. 한재여 여사는 신돌석 순국 후 일본 경찰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작고할 때까지 불에 탄 집에서 생활할 만큼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

                       당시 대일항쟁기에서 항일 의병장의 가족을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일병의 의심을 살만
                       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도 선뜻 신돌석의 후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한재여 여사는 독립을 지켜보고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74세

                       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손위 처남인 한용수[韓鎔洙:일명 정홍(政弘), 1875년생]도 신돌석 의진
                       에 참가했다가 청송지구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신돌석 일가는 부친이 경제적으로 지원했고, 자형(매형)은 신돌석을 돕다가 체포되어

                       어려움을 당하고, 처남은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동생 태범도 복수를 위해 나섰다가 체
                       포되어 투옥된 ‘독립운동 일가’이다.



                       신돌석의 체격과 성격

                        신돌석의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다. 자(字)는 순경(舜卿)이고 일명(一名) 신돌석[申乭石, 申
                       乭錫, 또는 돌선(乭先)], 신태을(申泰乙), 신태홍(申泰洪), 신대호(申大浩), 별명(別名)은 ‘태백산 호

                       랑’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하고 용감하기로 소문이 났고, 거리가 넓은 시내를 단번

                       에 뛰어넘을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한다. 1908년 10월 2일 일본군에 투항한 이재석(李
                       載錫)은 일본군 심문 중 신돌석의 생김새와 체격 및 성격을 이렇게 답했다.


                        신돌석의 얼굴은 크고 넓었으며, 턱도 넓은 편이었다. 키는 5척 6촌(약 170센티미터)이며 체격이

                        비대했다. 피부는 검었으며, 얼굴에는 천연두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턱수염은 적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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