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 -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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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에 대한 오해 - 평민이었는가?

              대일항쟁에 나선 대한의 의병과 의병장에 대해 배운 대다수 대한인은 ‘평민 의병장
            신돌석’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비범한 용모와 뛰어난 활약상과 함께 의

            병장에도 드디어 평민이 나왔음을 들어서 신분제가 동요되었다는 해설과 함께.

              하지만 우리는 실존 인물 신돌석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 못한다. 신돌석 장군에 대
            해서는 평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데, 실제로는 향리 가문으로 중인 계급이다.

            즉 집안이 처음 영해에 들어와 자리 잡을 무렵에는 사족(士族), 또는 최소한 향리로 출발

            했다. 그러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생활은 평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민은 일단 본관
            이나 자를 가질 수 없는데, 신돌석 장군은 평산 신씨 문희공파 32세 태(泰) 항렬로 알려

            져 있다. 의병 활동에 사용한 여러 가명을 마치 본명처럼 소개해서 평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이유는, 체제 특성상 하층민 중심의 무장 투쟁을 강조한 북한 학자들과 이를
            비판 없이 수용한 남한 학자들 때문이다.

              1907년 정미년 13도 창의군이 창설될 때 평민이라고 해서 합류가 거부당했다는 설
            이 퍼져 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신돌석은 거병 당시 진성 이씨 퇴계 종가의 지원을 받

            을 정도로 촉망받는 이였다. 신돌석 생가가 있는 마을은 퇴계의 집안인 진성이씨 집성

            촌 근처였다. 신돌석은 진성이씨 집안의 서당에서 퇴계의 방계 후손인 육이당(六怡堂) 이
            중립(李中立)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의병 활동 중 신돌석의 부하에는 양반 출

            신도 여럿 있었다. 또한 13도 창의군에는 평민 의병장 김수남 같은 이들도 당당히 포함
            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민 출신이라서 13도 창의군에 배제되었다는 주장은 편견에 찌든

            낭설에 불과하다. 실제 신돌석이 13도 창의군에 합류하지 못한 이유는 경북 영양 일월

            산 방면으로 밀려나 포위되어 있어서, 경기도 양주에 가지 못했던 것 뿐이다. 그가 13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부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향토 문화전자 대전                     신돌석 장군 생가지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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