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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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있는 모습, 부하들에게도 강력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신돌석의 영릉의진(寧陵義陣)

              신돌석은 1896년 19살의 나이로 의병에 참전했다. 신돌석이 참전한 의병은 영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관군의 공격으로 의병이 해산되고 영덕을 떠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 무렵 혼인을 한 신돌석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박상진(朴尙鎭, 1884~1921)

            등을 만났는데, 대한광복회 대표가 되는 박상진과는 의(義)로서 마치 형제처럼 지냈다
            고 한다. 평해의 월송정에서 시를 읊는데, 둘째 구절의 ‘단군의 터전’이 쓰러져 가고 있

            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유림의 사대 모화 의식이 아닌, 단군왕검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의병들이 다시금 일어나자, 준비 작업을 마친 1906년 음력 3

            월 13일 신돌석은 근처 주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규모는 100~300명 정도였다.
            전에는 어른들이 이끄는 의병 진을 따라 힘을 뽐내는 청소년이었지만, 이제는 의병 부

            대를 이끌어가는 주동적 위치에 있었다. 풍부한 전투 경험과 동지들을 만나 전략을 논

            의하고 정국의 동향을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시각을 갖춘 인물로 성장한
            것이다.

              신돌석이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참모장 김병두·박수찬, 중군장 김용욱, 도령장 한용

            수, 포대장 신태종, 소모장 이춘양 등이 크게 활약하였다. 병사 대부분은 평민이었으며
            양반도 여럿 참여하였다. 이 양반들은 신돌석이 과거 육이당에서 공부하면서 친분을

            쌓았던 인연으로 인해 많은 협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영릉 의진은 일본 선박을 여러 척 격침하고, 강원도 동해안 일대, 경상북도 내륙 지

            방, 원주 등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

            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고, 여러 구전 전설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초
            기에는 인원도 많았고, 물자도 비교적 풍부했는데 뒤로 갈수록 무기 확보가 어려워졌

            다.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과 토벌 작전을 피해 관아를 공격해 무기를 확보한 뒤 태백산
            맥에 요새를 구축하고, 1908년 11월까지 경북과 강원 남부 일월산과 동해안 일대에서

            연일 의병 항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이들은 날랜 행동력으로 일본군 토벌대를 여

            러 번 막아 내었고, 일월산과 백암산 사이에서 혹한기를 견디며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
            사하였을 때, 경기도와 강원도에도 신돌석이 나타났다는 정보는 가뜩이나 토벌 작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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