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 -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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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여 힘이 빠진 일본군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 의진
은 한국 의병 중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 부대로 평가되고 있다.
13도 창의군 참여 불발
1907년 8월 1일 새벽 일본이 강제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대한제국 군인들은
이에 항거하여 시가전을 벌였고, 이후 의병 진영에 합류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 운동
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국권을 회복하려는 13도 의병 연합부대가 편성되고 서울진공작
전이 추진되었다. 영남 지방을 담당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는 등 양반 출신의 유
학자 의병대장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지만, 결국 경상북도에
서 막혀 참여하지 못했다.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한 13도 의병 연합부대
의 서울진공작전은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실패하고 말았다.(1908.1)
만주로 갈 계획
1908년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일본군과 경찰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국내에서 의병
활동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의병장 중에는 부하들의 투항을 권
유하기도 하였다. 신돌석 의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앞으로 닥칠 혹한은 큰 부담이 되었
다. 병력은 대폭 줄어들고, 보급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버틸수록 부하들의 희생만 가져
올 뿐이기 때문에, 결국 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길을 찾아 떠나도록 명령했
다.
대신 그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만주로 가는 것이었다. 이미 홍범도를
비롯한 여러 의병 부대가 만주로 이동했다. 조선 의병들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발전
해 갔고, 의병뿐 아니라 신민회를 비롯한 계몽 운동가들도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
하기 위해 현지를 조사하고 토지를 물색하던 시기였다. 만주로 이동하여 새로운 투쟁
을 전개하려던 신돌석! 그러나 태백산 호랑이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1908년 겨울 그의
부하였다가 일본이 내건 투항자 면책 정책에 마음이 꺾여 투항한 김상렬 형제의 손에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순국 후 생가 인근 선산에 잠들었던 신돌석은 1971년 국립 서
울 현충원에 예우를 갖추어 안장되었다. 2017년 8월 대한민국 해군의 손원일급 잠수
함 9번 함이 신돌석 함(SS-082)으로 명명되었다. 1962년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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