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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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처음 열                     있었고, 서한 말년에 녹림군이 일어나고 적미

            산으로 부르다가 음이 비슷한 여산으로 바뀌                      의 난이 일어나자 읍인들이 난병(亂兵)들이 도굴
            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산진에는 신농씨가 태                     할까 걱정되어 능묘를 평지로 만들었다고 한

            어났다는 신농동(神農洞)이 있고, 염제고리(炎帝故                  다. 염제릉은 송나라 태조 건덕(乾德) 5년인 967

            里)라 써놓은 신농패방(神農牌坊), 신농교(神農橋),                년에 사당을 세운 이후 지금까지 1000여 년의
            신농문화광장, 염제신농기념관 등의 기념물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염릉현의 원명은 영현(酃

            있다.                                          縣)이었으나, 이곳에 염제릉이 있어 1994년에
              여산진 사람들이 이곳을 신농의 고향이라고                     염릉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나라 때 장사

            보는 근거는 『국어』「노어(魯語)」에서 “옛날 열산                 군 다릉현에 소속되어 장사다릉지미(長沙茶陵之

            씨(烈山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 온갖 곡식과 채                  尾)라고 부른 것이다. 염제릉을 이곳 사람들은
            소를 경작했다.”라고 했고, 『예기』「제법(祭法)」                 신주제일릉(神州第一陵)이라 부르고 있다. 섬서성

            에서 “여산씨(厲山氏)가 천하를 다스릴 때 백곡                   보계시에도 염제릉이 있지만, 규모와 영향력은
            을 경작했다.”라고 했으며 『제왕세기』에서 “신                   염릉현의 염제릉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역대

            농씨는 열산에서 일어나 열산씨라고 이르니 지                     왕조의 인정도 받지 못하였다.

            금의 수주 여향(厲鄕)이다.”라는 기록에 근거한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교통이 불편하던 시대
            것이다.                                         에 신농이 호남성의 동남쪽에 있는 염릉현까지

                                                         갈 수가 없다고 여겨 염릉현의 염제릉을 신농

            돌아가신 곳                                       씨의 아들 주(柱)의 무덤으로 보기도 하고, 8대
              염제릉은 호남성 주주시(株洲市) 염릉현(炎陵縣)                 손 유망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에 있다. 염제신농씨의 안장(安葬)과 관련된 기

            록은 진(晉)나라 때 황보밀이 지은 『제왕세기』                   신농씨의 10대 공적
            에 최초로 나타난다. 『제왕세기』를 보면 염제                     첫째, 처음으로 뇌사(耒耜)를 만든 것이다.(制

            는 “재위 120년에 돌아가시자 장사(長沙)에서                   耒耜) 뇌사는 쟁기와 보습인데 농업 생산력을
            장례를 치렀다.”라고 했고, 송(宋)나라 때 나필                  증대시키는 농기구이다. 『주역』「계사전」에서

            (羅泌)이 지은 『노사(路史)』에서는 더욱 구체적으                 도 “복희씨가 죽자 신농씨가 일어나서 나무를

            로 “염제가 돌아가시자 장사 다향의 꼬리(茶鄕                    깎아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휘어 쟁기를 만들
            之尾)에 장례지냈는데, 이곳은 다릉(茶陵)이라 한                  어서 밭갈고 김매는 이로움으로써 천하사람을

            다.”라고 하였다. 지방지인 『영현지(酃縣志)』의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서한 시기에 이미 능이                      둘째, 밭갈고 김을 매서 농업을 크게 발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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