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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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청산리 대첩 이후 대한 독립군 상황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잔악한 학살극을 만주 지역에서 벌였다.
1920년 경신년 간도 참변이다. 동포들의 희생을 본 독립군은 소련과 만주 국경 지대인
밀산부로 올라가 서일(徐一, 1881년 2월 26일 ~ 1921년 8월 28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
단을 조직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하고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자유시로 올라갔지만,
독립군 사이 총격전이 벌어지는 비극적인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남은 독립군은 만
주벌판으로 돌아와 3부로 결성하며 항일 의지를 다졌다.
일제는 중국 군벌 간에 맺은 미쓰야 협정으로 대한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런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에 맞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해 수
많은 국내 진공 작전과 만주에서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 있었다. 조선혁명
군 양세봉 장군으로 평양시 애국열사릉과 서울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애국지사 묘
역-149호-에 동시에 안장된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이다.
어릴 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크게 감동
양세봉(梁世奉, 1896.6.5 ~ 1934. 8. 12) 장군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세리면(洗里
面) 연산동(連山洞)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봉(瑞鳳), 윤봉(允奉)이며, 호
는 벽해(碧海)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서당에서 일하면서 어깨 너머로 천자문, 명심보감
등을 배웠다. 일제가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어린 시절부터 항일 의식을 지니
고 있었다. 1909년 10월에 대한(大韓)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역에서 대한
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에 의해 처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기개에 경탄
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부친 사망 후 집안 살림을 맡게 되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
가 곤란하여, 1917년 겨울 가족과 같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 관전(寬甸), 환인(桓仁)을 거
쳐 영릉(永陵)에 도착하여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 갔다. 이
후 1919년 봄 국내외에 걸친 거족적인 3·1혁명이 일어나자, 흥동학교(興東學校) 교장 이
세일(李世日)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천마산대에 가입, 무장 활동에 참가하다
1922년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金明奉)·정창하(鄭昌夏) 등과 연계하여 항일운동을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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