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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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 연합군 조직, 200여 차례 항일전과 영릉가 전투 대승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중국 의용군 총사령 이춘윤(李春潤)과 협의하여 요녕 민
                       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을 조직하는 협정을 체결한 후, 조선혁명군을 특무대와 선전대

                       대로 편성하였다. 조선혁명군이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게 된 것은

                       중국군에 비해 부대 규모가 작지만,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중
                       연합군의 편성은 각처에서 발호하고 있는 중국인 무장단체인 대도회(大刀會)와 홍창회

                       (紅槍會) 등의 무질서한 행동을 자제시켰으며, 동시에 중국인들이 대한인을 일제의 앞잡

                       이처럼 여기는 등의 좋지 못한 감정도 호전되었다. 또한 중국 군벌인 당취오(唐聚五)·왕
                       육문(王育文) 등도 이에 호응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중 연합군은 일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렀다. 1932년 3월 한·중 연

                       합군은 신빈현의 왕청문에서 무순 천금채(撫順 千金寨)로 진군하는 도중 신빈 남쪽에 숙
                       영하게 되었다. 이 정보를 들은 신빈현 주둔 일본 관동군은 박격포, 기관총 등 중화기

                       로 무장하여 연합군을 총공격하였다. 그러나 지리에 익숙한 조선혁명군의 전술에 말려
                       들어, 일본군은 교전 1시간 만에 고지를 빼앗겨 퇴각하였고 30여 리를 추격당했다. 이

                       전투로 한·중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둠과 동시에, 양 민족 간의

                       갈등을 융화시키고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좌)항일무장투쟁 지도 ⓒ고등학교 역사부도-천재교육
                       (우)중국에 있는 양세봉 장군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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