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1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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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였으나 곧 ‘카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돌궐에는 두 명의 카간이
존재하게 되었고, 동서 두 카간이 대립하면서 돌궐은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지게 되었다.
동돌궐은 건국자인 일리 카간의 아들 무한 카간 계통으로, 서돌궐은 일리 카간의 동생
실점밀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졌다.
돌궐제국이 동서로 완전히 분열한 583년은, 당시 중국에 수(隋)나라가 들어선지 불
과 2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수 왕실은 강력한 돌궐제국에 위협을 느껴 동서 돌궐의
대립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여러 차례의 고구려원정이 실패한 끝
에 619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그를 이어 등장한 당(唐)도 초기에는 돌궐에 대해 낮은 자
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태종 이세민은 동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철륵, 설연타 등 투르크
부족들의 반란을 기회로 삼아, 돌궐과의 세력관계를 역전시켰다. 그는 동돌궐의 힐리
카간을 사로잡고, 동돌궐의 지배를 받던 여러 부족들로부터 ‘텐그리 카간’(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하늘이 천명을 부여한 카간’이라는 뜻으로, 정관 4년(630)의 일이
었다. 역사에서는 이 해를 동돌궐이 멸망한 해로 본다. 당은 복속한 여러 투르크 부족
들의 우두머리를 중국 관직인 도독과 자사 등에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돌궐을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한족 관리를 통한 직접 지배가 아닌, 현지 부족 우두머리를 통한
간접지배였는데, 굴레와 고삐를 이용하여 소나 말을 다루는 것에 비유하여 ‘기미(羈縻)’
지배라 하였다.
서돌궐은 동돌궐이 멸망한 후에도 한 세대 정도 더 존속하였지만, 당나라의 군사적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카간이 파미르 고원 너머로 도주했다가 포로가 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당나라는 동돌궐과 마찬가지로 서돌궐 지역에도 다수의 도독부와 도호부
를 두었는데, 오늘날의 신장위구르 지역은 물론, 우즈베키스탄과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땅에도 도독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지배 밑에 있던 돌궐 부족들은 쿠틀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682
년 당나라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돌궐제국을 재건하였다. 쿠틀룩은 후일 일테리쉬 카간
이 되었으며, 그는 예전 돌궐제국을 건국한 일리 카간의 후손이었다. 새로운 돌궐은 순
식간에 동돌궐 제국의 옛 영토를 되찾았다. 이 새로운 나라를 흔히 ‘제2돌궐제국’ 혹은
‘후돌궐제국’이라 하는데, 682년부터 744년까지 대략 60년 정도 존속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698-926)보다 그 존속 연도가 훨씬 짧다. 몽골
의 수도 울란바토르 근처에는 2개의 석비가 서 있다. 이 비석은 제2 돌궐제국의 부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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