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8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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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3월 하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이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전격적으로 흥경성을

            점령하자, 양세봉 장군은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중국 의용군 이춘윤 부대
            1만여 명과 연합하여, 조선혁명군은 동문으로 돌입하고 중국 의용군은 북문을 총공격

            하여 기적군을 진맥진한 적군은 서남문으로 패주케 했다. 마침내 흥경성에 대한의 태

            극기와 중화의 청천백일기가 펄럭였고 한·중 연합군의 사기는 충천하게 되었다.


            흥경성(興京城), 노구대, 쾌대무자 전투에 참전, 연전연승

              양세봉 장군은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홍경현 진주령(珍珠嶺)에
            서 일본군 기차를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처단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전을 전

            개하였다. 7월 중순에 양세봉 부대는 이춘윤 의용군 부대의 잔류병 5백 명과 합세하여

            무순 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1개 연대 규모의 일본군과 교전, 만 2일간의 격전을
            치렀다. 그 뒤 일군은 다시 1개 대대의 병력으로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주둔하고

            있는 제1방면군 최윤용 부대를 습격하였으나, 조화선 부대의 지원을 받아 일군은 격퇴
            되고 말았다. 이때 패퇴하는 일군을 다시 최주봉 부대가 추격하여 80여 명을 사살하였

            다.



            독립군의 맹장, 일본 밀정에 의해 최후를 마치다.

              이 무렵 일제의 밀정 박창해(朴昌海)가 혁명군을 직·간접으로 후원하던 중국인 왕명번
            (王明藩)을 매수하여 환인현에 머물고 있던 양세봉 장군을 찾아가 중국 항일군과 연합을

            논의하자는 구실로 장군을 환인현 소황구(小荒溝)의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1934년 8월

            12일(음) 장군은 부관 김광욱(金光旭), 김성해(金星海), 김추상(金秋霜)과 같이 왕 씨를 따라
            나섰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던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수십 명의 괴한이

            뛰쳐나와 일행을 포위하며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나 양세봉 장군은 두 눈을 크게 부릅

            뜨고, 위엄 있게 꾸짖으며 저항하였고, 끝내 밀정 박창해와 중국인 왕 씨 등의 주구배
            (走狗輩)의 저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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