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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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7

                       고, 남만주 화전현(樺甸縣) 일대에서 항일 무장 활동, 부일배(附日輩) 숙청 등의 활동을 하

                       였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저격을 지휘

                        일제 침략의 원흉인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국경 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
                       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자, 참의부 제2중대 제1소대(소대장 한웅권)와 협력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못하는 만주 쪽 강변 절벽에서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이토를 저격하기
                       로 하였다. 예상대로 배가 다가와 사격을 시작하였지만, 의외로 사거리가 너무 멀었고,

                       일본 측의 저항이 격렬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일본 제국 내 총리 다음의 권력자인

                       조선 총독 처단이라는 큰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대한 독립군의 정보력과 실행력은 일
                       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작전이었다. 특히 사이토는 3.1 혁명 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으로 조선 강점에 대하여 거짓 자랑만 하고 있었으니, 이런 의거는 그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었음은 물론 대내외에 대한 독립군의 활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와 만주의 봉천성

                       경찰청장 간에 소위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라는 재만한인취체법(在滿韓人取締法)을 체결하
                       게 되었고, 중국 당국은 독립운동을 탄압할 의무를 갖게 되어 독립군 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통의부와 정의부 그리고 국민부

                         이후 통의부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
                       적 떼들의 급습으로 수십 명의 독립군들

                       이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에 여러 단

                       체가 모여 김동삼 선생을 중심으로 새롭
                       게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게 되었다. 하

                       지만 1년 만에 외교 투쟁을 중심으로 했
                       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만주 지

                      역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대표

                       자들이 각료로 입각하게 되었다. 이에 만
                                                                             조선혁명군 속성 군관학교 유적지
                       주에서는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주장                            ⓒ국가보훈처-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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