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 - 대한사랑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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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7

            다고 『고려사』의 「예지」는 전하는데, 이때 가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짜 기자 무덤과 사당까지 만들어진 셈이다. 하                     3600년이 되었으니, 곧 주원(周元)의 기회입니다.
            지만 당시 사서를 살펴보면 국가의 기원을 환                      마땅히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도(道)를 쫓되 공

            인 – 단웅 – 단군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리화복(功利禍福)을 논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

            수 있다. 1287년 쿠빌라이의 강력한 고려 제재                   면 하늘(上天)이 진실로 돕고 음양(陰陽)이 때를 맞
            속에서 이승휴가 지은 기전체의 『제왕운기(帝王                     추어 국운이 길어질 것입니다.

            韻紀)』에는 『삼국유사』 기록을 대부분 인용하여                    (吾東方, 自檀君至今, 已三千六百年, 乃爲周元之會, 宜遵
            1028년간의 단군조선이 실존했음을 기록하였                      堯·舜六經之道, 不行功利禍福之說. 如是則上天純祐, 陰陽

            다.                                            順時, 國祚延長)

              『고려사』 「열전」 백문보(白文寶)편에는 ‘동방                                   - 『고려사』 「열전」 제신 백문보
            의 역사가 단군으로부터 3600년이 되었다’는

            구체적인 단기(檀紀)인식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기자는 조선 시기에는 중화사대의 상징적 인
            보여준다.                                        물이 되었다. 이렇다보니 조선 시기에는 성인

                                                         (聖人) 기자를 넘어서 기자가 조선을 통치했다

                                                         는 ‘기자조선’이 만들어진다. 윤두수는 1577년
                                                         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명나라의 사인

                                                         (士人)로부터 기자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받고

                                                         골몰하다가 기자에 대한 스토리를 집대성하여
                                                         『기자지(箕子誌)』를 편찬하였으며, 이후 이이(李

                                                         珥)는 그 책을 언급하며 비판을 가하면서 1580

                                                         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출간하여 조선의 통
                                                         치자로서 기자에 대한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로써 ‘기자조선’이 역사 속에 탄생한다. 이이를
                                                         기점으로 조선에 ‘기자학(箕子學)’이 시작된다.



                                                         기자조선을 위해 평양에 낙랑군을 못 박다

                                                          한사군 낙랑군에 대한 기사는 초기 기록의

                                                         하북성 근처의 위치에서 역도원의 『수경주(水經

                      『제왕운기』 권하, 동국군주개국연대                注)』에 의해 요동의 고구려 평양에 있는 패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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