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대한사랑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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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 경남 함양에 2년간 기거하면서 천년의 숲 상림 공원을 걷게 된 어느날 우연
                       히, 2001년 세워진 역사 인물 공원을 만났다. 최치원 선생을 비롯해 고려의 충신 덕곡

                       조승숙 선생 등 함양의 역사적 인물 11인의 흉상과 함양군을 거쳐 간 역대 관리들의 선
                       정비가 세워져 있었다. 함양은 예로부터 좌(左)안동 우(右)함양이라 불린 영남의 대표적

                       인 선비 고장으로 오랜 역사를 통해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고려 말과 조선 초, 격변의

                       시대 속에서 충절을 지키며 학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덕곡 선생. 그의 숨결이 살
                       아숨쉬는 교수정(敎授亭)과 함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생애
                        조승숙(趙承肅, 1357–1417)선생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활동한 문신이자 유학자

                       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덕곡(德谷)으로 함양 출신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으로 고려 개국

                       공신이었던 조정(趙鼎)의 11세 손이다. 아버지는 조경(趙璥)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
                       氏)이다.

                        덕곡 선생은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1376년(우왕 2)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특별히 저작랑(著作郎, 왕의 직속 문서 작성 담당관)에 제수되어 충하사(充賀使, 중국의 경사

                       를 축하하려고 보냈던 사신)로 중국 조정에 갔다가 거기서도 장주(章奏, 왕에게 올리는 글)을 잘

                       지어 중국 사람들을 놀라게 해 그곳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 관직의 귀천에 상관없
                       이 문재가 뛰어난 자에게 임금이 직접 내리는 물고기 모양의 공복의 띠에 매달아주는 명예로운 장식 주머니)

                       를 받고 귀국할 정도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 뒤 향리에 퇴거할 때에는 임금이 침향궤(沈香几)를 보내면서 “너의 성품이 강직하기
                       가 마치 이 물건과 흡사하므로 글씨를 새겨 주노라.”는 칭찬을 들었다. 1391년(공양왕 3)

                       33세에 부여감무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바뀐 나라의 하늘 밑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도 없고, 또한 그 공기마저도 마실수 없다”

                       며 고향에 돌아가 교수정(敎授亭)을 짓고 두문불출하면서 여생을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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