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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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헤이그 특사 파견
1907년 정미 경운궁(덕수궁) 중명전. 봄꽃 향기가 궐 내에 가득했지만, 대한제국에 봄
은 없었다. 2년 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빼앗겼다. 이른바 을사늑
약! 대한제국 황제, 고종 광무제는 1906년에 있을 예정이었던 만국평화회의에 심복인
이용익을 특사로 파견하려 하였다. 그러나 회의가 1년 연기되고 이용익도 급사하는 변
고가 생겼다. 비통에 잠겼지만, <대한매일신보>등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선언하
였고,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내 ‘대한이 독립국이고 자주국임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만천하에 선포’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준이 찾아와 특사 되기를 청하였다. 이준은 이용익의 집안 사람으로 고종의
수결이 담긴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과 친서를 가지고 4월 22일 한성을 출발했고 블
라디보스토크에서 정사 이상설 등과 합류하였다.
보재(溥齋) 이상설
헤이그 특사의 정사는 강압적인 을사늑약 현장
을 증언할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이었다. 이상
설은 을사늑약 당시 부당함을 주장하다 쫓겨났
다. 안중근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상설은 과
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법률가였다. 을사늑약
당시 고종에게 죽음으로 나라를 구하란 취지
의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가산을 정리하
여 망명길에 올라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瑞
甸書塾)을 열었다. 헤이그 특사 정사로 활동한 이
후 연해주에서 무장 투쟁을 벌이려 했지만, 러시
아가 일본과 동맹을 맺어서 더 활동이 어려웠고,
1916년 과로로 병석에 누운 뒤 1년 만에 동지들
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우수리스크에서 눈을 감
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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