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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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1호 검사
이준(李儁)은 1859년 음력 1월 21일 철종 9년 전주 이씨 집성촌인 함경도 북청도호부
중산사(中山社) 용전리(龍田里) 발열동(현 함경남도 북청읍 용전리 발열동)에서 부친 병관(秉瓘)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선재(璿在) 본명은 순칠(舜七), 아호
는 일성(一醒), 해사(海士)이다. 어려서부터 명민한 그는 5살 되던 1863년에 부모님을 모
두 잃고 친할아버지 이명섭(李命燮)과 작은아버지 이병하(李秉夏) 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익
혔다. 17세 때 상경하여 형조판서 김병시, 흥선대원군과 교제하여 친분을 쌓았다. 대원
군의 도움을 받아 학문에 매진하였고, 29세에 함경도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당시 함경
감사였던 조병식과 협의 아래 사재를 털어 경학원(북청농고)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
썼다. 1889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갔다가 김병시의 주선으로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
던 16세였던 이일정과 결혼했다. 이일정은 후에 국채보상운동 때 조직을 꾸려 적극 참
여하며 일제를 규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처음 도입된다. 법률
관료를 배출하는 ‘법관양성소’도 이때 시작되었다. 법관양성소는 서양의 민법과 상법,
형법, 소송법, 국제법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1기 졸업생 46명 중 가장 먼저 한성
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된 주인공이 이준이었다. 당시 검사는 지금과 달리 각 지역 재
판소 소속으로 이준은 우리나라 1호였다.
1906년 6월18일, 대한제국 사법기관인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개월 후에는 특
별법원 검사도 겸임한다. 평리원 검사 5년 차에 상관이지만, 탐관오리였던 이하영 법무
대신(장관)을 법을 불공평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로 평리원에 기소해 세인의 주목을 받았
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하
게 근무했다.
한편 독립운동가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도산 안창호와 비밀결사를 조직하
는 한편, 안중근의 청으로 진남포의 삼흥학교에서 애국 강연을 나서기도 했다. 이를 지
켜본 고종은 이준의 됨됨이를 높이 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이
독립국’이라는 뜻을 전달하는 특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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