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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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6월 28일, 특사단은 “항고사”와 함께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회의참가국위원회에 보
낸다. 같은 날짜의 비공식 회의보 <Courrier de la Conférence> 지에 “항고사”가 게재된다.
다음 날인 6월 29일 특사단은 회의를 주재한 러시아 제국 수석 대표 넬리도프(Aleksandr
I.Nelidov)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6월 30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대
표를 찾아 가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7월 1일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 장관의 면
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이 시점에서 특사단의 존재는 그들이 접촉한 열강 측에
서 일본 측에 통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은 비공식적으로 각 나라와 만나서 ‘대한제국 특사단이 왔는데, 자격 없다. 만나
면 우리랑 사이 안 좋아질거다’라는 협박과 회유 공작을 폈다. 여기에 더해 일본 대표
가 특사단을 찾아와 위임장을 확인하려 하였다. 이는 고종을 정치적으로 엮어 퇴위시
키려는 명분을 쌓기 위해서였다. 특사단은 이미 의도를 파악하고 바로 쫓아냈다. 일본
은 무력으로 특사단을 감금할 수 있었으나, 각 나라 대표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일본
제국과 대영제국 등의 방해와 같은 제국들인 서구의 방관으로 대한제국 대표들은 회의
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열 수 없던 문 앞에서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비넨호프 왕궁 기사의 전당은 현재 네덜란
드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
외교권이 없어, 초청장이 없어, 힘이 없어 결국 열어 젖히지 못한 문. 그 앞에서 이준은
지탱할 수 없던 패배감과 무력감 앞에 무릎이 꺾였다. 비애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
로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7월부터 몸이 안 좋아졌다. 화도 나고 답답한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의
무기력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분이 차올랐던 것일까. 얼굴에 악성 종기가 나서 중
태에 빠졌다. 1907년 7월 14일 저녁, 이준이 사망했다. 7월 19일,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 열사를 가매장하고 남은 특사 일행은 뉴욕으로 향했다. 9월 6일, 이준의 장례식
이 열렸고, 이준의 동생과 대한제국의 외교관, 친구, 헤이그 YMCA 회장 등이 참석을
했다. 10월 18일,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폐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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