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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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평양 대동강면 무덤떼 분포도
4세기 후반으로 낙랑군 시기와 맞지 않고, 무 랑국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덤 양식도 일반적인 한묘(漢墓)나 가까운 요동 그런데, 낙랑국은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
반도 남단의 한묘와도 차이가 있었다. 다만, 지 왕에게 항복하였고 이때 고구려에 복속되지 않
배층의 전유물인 대형무덤이 한정된 지역에 집 았다 해도, 기원후 44년 후한 광무제가 공략한
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을 볼 때. 이 지역은 고 ‘낙랑’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기원후 4세기 후
대 사회의 중심지로 그 축조 세력은 낙랑군이 반까지 대동강 남안에 무덤떼를 축조한 세력으
아니라 한반도 내의 정치체이며 구체적으로는 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백제’라고 추정한 것이다.
[대무신왕 15년(32)] 여름 4월에 왕자 호동(好童)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평양에 자리 잡 이 옥저(沃沮)에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
은 정치체가 남한 주류에서 주장하는 ‘낙랑군’ 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물어 말하기를,
이나, 북한에서 주장하는 ‘낙랑국’이 아니고 “그대의 낯빛을 보니 예사 사람이 아니오. 어찌
‘백제’였다면, ‘그들이 처음 나라를 세운 위례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가!”라고
성은 어디였고, 언제 그곳으로 이동했을까?’하 하였다. …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
는 것이다. 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평양에는 낙 대비하지 못하였다. 우리 병사가 엄습하여 성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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