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대한사랑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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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에 다다른 연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로, 하남 위례성을 경기도 광주의 하남 춘궁리
것을 알았다. 마침내 딸을 죽이고 나와 항복하였 라고 주장하였다. 이후부터 위례성은 서울 한
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제2 대무신왕> 강 유역에 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약용은 근초고왕이 371년 한산으로 천도
[대무신왕 27년(44)] 가을 9월에 한나라의 광무제 한 기록인 『삼국유사』「왕력」편의 “병진년에 한
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 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기니 지금의 광주(廣州)이
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 다”라는 문구에 착안하여, 자신의 고향인 광주
(漢)에 속하게 되었다. 의 하남 춘궁리를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한 것
-『삼국사기』「고구려본기」<제2 대무신왕> 이다. 이후 이병도에 의해 춘궁리설이 주목을
받았지만, 백제 도성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
위례성이 서울 지역에 비정된 과정 지 않으면서 힘을 잃게 되었다.
하남 위례성은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삼국 대일항쟁기에는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이 주
유사』의 직산설(위례성이 충남 천안시 직산 지역에 있 목을 받았다. 홍수로 성벽이 유실되면서 사치
었다는 학설)에 따라서 지금의 충남 천안으로 여 품에 속하는 중국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
겨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정약용이 직산설 후 1997년부터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대한
을 부정하면서 하북 위례성을 서울 북한산으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풍납토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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